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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old_scrapbook 2003. 11. 1. 04:22
* 이 글을 읽기전 '네멋대로 해라'의 전반부에 관한 리뷰인 'Shinny Happy People'을 읽어보시는게 좋습니다.
OST의 표기를 따르자면, MBC '네멋대로 해라'의 영어제목은 'Ruler of Their Own
World'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것이 '네멋대로 해라'라는 한글제목이 미처 표현해주지 못한 이 드라마의 또다른 반쪽을 소개시켜준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지금 젊은이들의 일상을 '트랜드'로 잡아내면서 그것을 '네멋'이라고 한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삶의 'Ruler'임을 얘기하는 '거대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은 결국 '드라마 주인공'의 삶이었지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네멋대로 해라'는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이 있고,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이 다 음악인 것처럼 경(이나영)과 복수(양동근)의 삶도 삶이고, 정달(김명국)의 삶도 삶이다. 그들은 각자의 '내멋'을 가지고 그 원칙에 따라 이 넓고 끝없는 세상 한 곳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살아간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처럼 자신의 세상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희노애락을 느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Ruler of Their Own World
그래서 '네멋대로 해라'의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애써 만들어놓은 그들의 '착한 세계'를 다시 해체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과 미래사이에서 고민하던 복수가 미래에게 위악적으로 "네가 싫다"고 말하는 순간, 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 대한 배려로 감싸안던 '네멋대로 해라'의 세계는 서서히 그들의 '내 멋'이 착한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며 그들 나름대로 각자의 해결책을 내놓기 시작한다. 아무리 '네멋대로 해라'속의 사람들이 착하다해도 복수가 소매치기였고 뇌종양에 걸린 상태라는 것, 복수가 경과 미래중 어느 한명을 택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경과 미래와 중섭이 복수의 병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복수가 소매치기였다는 사실을 안 유순(윤여정)은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복수의 병을 알게된 중섭과 경은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 '네멋대로 해라'속의 사람들이 착하면 착할수록 그것은 비극적이다.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것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거대한 벽을 만났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래서 17회 이전의 '네멋대로 해라'의 후반부는 지극히 비극적이다. '내 멋'대로 솔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가치관, 즉 착한 마음이 두드러지면 두드러질수록 그 세계의 해체는 더할 수 없이 잔인하다. 중섭의 죽음이 '네멋대로 해라'의 팬들을 가슴치게 만들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사건의 크기보다는 오히려 중섭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 복수없으면 살지 못하는 중섭의 착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비극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비극은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밖의 현실
그렇다면 과연 그 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네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는 삶의 자세를 얘기하던 것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착하기 때문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삶의 무게를 벗어나려했던 중섭과 달리, 경이 선택한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 일상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그 삶을 최대한 성실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네멋대로 해라'의 전반부가 일상의 고단함을 '착한 마음'으로 돌파하면서 현실을 바탕에둔 환타지가 되었다면, 후반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딪히지 않는, 심지어 죽음이 그 앞에 닥치더라도 포기하지는 않는 삶에 대한 의지로 그것을 돌파하면서 또 하나의 환타지를 만들어낸다. 착하다는 이유로 그 삶을 그저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더럽고 힘든 것까지 다 받아들일 때 그들의 삶은 '죽음뒤의 삶'까지도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후반으로 갈수록 보다 더 등장인물들의 '드라마밖'의 현실로서의 일상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독특한 에피소드로 평가될 17-18회는 그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에피소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드라마'의 주인공들에게 온전히 그들의 일상을 돌려줬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고, '네멋대로 해라'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행을 떠나면서 그동안 서로 알 수 없었던 더럽고 치사한면(^^;)을 알게 된다. "좋아해도 되나요?"를 수줍게 말하던 경은 어느덧 미래의 이름을 언급하는 복수에게 대책없이 삐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겠다며 복수를 끌고 다니기도 하며, 복수는 그런 경에게 "여행와서 점수 깎였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손이 아닌 발을 사랑하는 삶
그들은 서로의 속되고 추한면들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각자의 일상에 침입하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서 오히려 더 각자의 삶에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일상의 존재는 위대한 것이다. 복수가 경에게 '야한 남자'가 되고 싶기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바로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벽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이 '야한 남자'가 되지 못했을 때 조차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들의 생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더럽고 혐오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삶마저 껴안을 때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아닌 함께 사는 삶이 가능한 것이다. 왜 복수와 경은 자꾸 손이 아닌 발을 만지고 씻어주는가. 그것은 깨끗한 손이 아닌 더러운 발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일상, 더럽고 추할수도 있는 일상을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섭은 복수를 사랑했으되 복수가 자신의 이상에 맞춰 살아가기를 바랬고(공부해서 대학을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더 이상 버티지 못했지만 경은 복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멋대로' 복수와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더럽고 구질구질하며 절대
로 해피엔딩일수만은 없는 그 삶에 대한 애정이 그들을 살아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인 것이다.
그래서 18회에서 포항으로 내려간 경과 복수를 맞이하는 다양한 사람들은 복수와 경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인물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네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복수와 경의 이야기를 보지만, 그것은 복수와 경의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모든이의 이야기일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기본적인 스토리를 무시하고 갑자기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이 드라마가 드라마의 만들어진 현실이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 전체를 조명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복수와 경이 활동하던 '네멋대로 해라'의 세계속에서는 복수와 경같은 인물이 오직 그들뿐이지만, 넓은 세상에는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복수처럼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복수와 경의 미래를 연상시키듯 싸우는 부부들이 존재하며, 복수처럼 자신을 떠나가버린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진사를 만나기도 한다. 비록 우리가 TV를 통해 보는 그들의 인생은 복수와 경이라는 주인공을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일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각자의 삶이 있고, 카메라가 그들을 벗어난 순간에도 그들의 삶은 포항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그 구불구불한 미로같은 길들에서 겨우 만난 복수와 경은 그렇게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말이다.
모두에겐 각자의 삶이 있다
또한 그들이 돌아온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19-20회의 에피소드는 철저하게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네멋대로 해라'의 각 인물들이 어느덧 '네멋'의 세계를 떠나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17회부터 점점 복수와 경에 초점을 맞추던 '네멋대로 해라'는 19회와 20회에 이르러 복수와 경에게 그들만의 삶을 부여하면서 그밖의 인물들을 점점 그들 세계밖의 '주변인'으로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복수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미래는 어느덧 복수와 옛날일을 이야기하는 인물이 되고, 복수와 경의 관계이전부터 경을 알았던 동진은 새로운 애인을 만나 경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며, 액션스쿨 사람들은 복수가 떠난 후에도 자신들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 버스에서 고복수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경에게 립스틱을 발라주는 복수의 모습을 보며 웃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복수와 경의 모습은 그 세상사람들중 하나를 뽑아서 좀더 가깝게 들여다본것일 뿐이다. 이 드라마가 갑자기 이전의 형식을 무시하고 마지막회에 각 인물들의 나레이션을 집어넣은 것은 이 드라마가 특정 주인공을 만들고 보여주는 드라마라기 보다는 수많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중 한명을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통해 이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에서 거의 처음으로 '마지막'의 개념이 불분명한 열린구조를 가진 드라마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일상은 끝없이 계속되고,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만약 복수가 죽었다하더라도 전경은 복수가 그러했듯 그 죽음을 이겨내고(그것이 비록 담배만 피는 삶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갈 것이고, 다른 인물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미 '네멋대로 해라'가 작품안에서 그렇게 각자의 삶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20회라는 시간이 흐르는동안 '네멋대로 해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관계를 맺어나가다가 어느시점에서부터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 또다른 관계를 맺어나가게 되었고, 동시에 그 나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유순은 가게를 정리하고 야쿠르트를 팔게 되었고, 강의 아내는 강과 헤어지고 자신의 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사는 독립적인 여성이 되었으며, 미래와 그녀의 동생 현지는 과외학원에서, 그리고 미팅에서 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유순과 미래, 현지와 동진은 서로를 보아도 알지 못한다. 복수와 경을 통해 연결되었던 각자의 삶은 복수와 경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결국 다시 분리되는 각자의 삶이며, 동시에 그 세계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주인공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네멋대로 해라'라는 세계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보는이와 소통한 드라마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끝'이 아니라 오히려 카메라가 비켜선 후 계속 이어질 이들의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시작과 끝이 분명한 스토리가 아닌 개개인의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에 중심을 맞춘 드라마로의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한국의 드라마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시즌제 드라마에 어울리는 형식으로, 실제로 17-18회의 에피소드는 드라마의 중심 스토리를 따라가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에서는 매우 엉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매회 하나의 에피소드를 등장시키는 미국의 드라마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이것은 일종의 외전으로, 복수와 경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멋대로 해라'는 20회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트랜디 드라마의 외양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시에 한국 드라마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여러 시도들을 하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과연 한국의 어떤 드라마가 그 끝에 등장인물들의 인생에 대한 명확한 답도주지 않은채 오직 희망적일 수도 있는 미소 하나만으로 드라마를 끝맺음하고, 모든 이의 삶 하나하나에 각자의 세계를 부여할 수 있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라는 '네멋대로 해라'의 세계관은 결국 드라마의 정형성을 탈피하는 요소로 작용하면서 이 드라마를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드라마는 아닐지몰라도 개념상에서 역사상 가장 독특한 드라마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진정한 의미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일반 시청자가 아닌 '네멋대로 해라'의 '매니아'들과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네멋대로 해라'의 후반 에피소드가 이런식으로 진행이 가능했던 것은 제작진의 역량보다는 오히려 그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더 큰 역할을 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네멋대로 해라'에 대한 절대적인 성원이 제작진들로 하여금 보다 대담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17회부터의 에피소드는 제작진들이 이 드라마의 매니아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에 가깝다. 17-18회에 들어있는 수많은 상징들, 이를테면 복수의 삶과 죽음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마치 복수와 경의 모습들을 조금씩 나눠놓은듯한 포항의 인물들에 얽힌 에피소드등은 이 드라마를 초반부터 보아온 사람들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이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들은 TV라는 불특정다수가 보는 드라마를 소수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보는 작품을 만드는듯한 자세로 자체 패러디와 상징을 과감하게 넣어 작품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끌고나간 것이다. 또 19-20회, 특히 20회의 에피소드에서 서로를 모르는 '네멋 세계'속의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경과 복수의 부부로서의 일상이 담담하게 비춰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드라마의 열성적인 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다루는듯한 마지막회의 에피소드는 드라마를 보다 안보다 하는 일반적인 드라마 시청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임에 틀림없지만, '네멋대로 해라'를 열성적으로 보아왔던 매니아들은 오히려 동진과 현지가 만나는 것에 대해, 유순과 미래가 만난다는 것에 열광하며 그것의 의미를 알아내려한다. 그중에는 제작진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해석의 맞고 틀림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그렇게 능동적인 자세로 드라마를 보고, 그것이 다시 제작진에게 영향을 끼쳐 제작진들이 팬의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드라마에 대사와 스토리뿐만 아니라 여러 영상의 이미지나 등장인물들의 관계속에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 그리고 팬서비스적인 부분들을 과감하게 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18회의 수수께끼같은 모든 요소들, 그리고 20회에서 보여주는 각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이 주는 편안한 느낌은 이 드라마의 팬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제작진들이 그 팬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네멋대로 해라'는 제작진이 시청자가 아닌 '팬'을 '믿고' 자신들이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해본 거의 유일한 드라마이자,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이 서로 적극적인 소통을 이룬 유일한 드라마로 남게될지도 모른다. 마지막회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등장하는 "그동안 함께 마음을 나누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라는 문구는 이 드라마의 제작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이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 드라마를 만들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기존의 형식을 깨고 모든 사람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마음을 나눌 때, 이 드라마는 어느새 그들만의 '거대한' 세계를 만든 작품이 된 것이다. 이제 '네멋대로 해라'는 종영되었고, '네멋대로 해라'를 통해 모인 수많은 '네멋 폐인'들은 다시 각자의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네멋대로 해라'속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서 그들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삶의 한순간은 끝났다. 그러나 그 감동은 계속되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ps. 아마도 18회의 에피소드에 대한 해석을 기대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 대해 어떤 확정된 해석을 내린다는 것은 매우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보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그걸 즐기면 그걸로 족할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그에 관한 해석은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18회 에피소드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결국 복수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복수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매치기나 사진사가 서울말을 쓰는 것, 즉 복수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은 이들이 곧 복수와 같은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되구요. 또 이점에서 본다면 복수앞에서는 서울말을 쓰는 호텔 지배인은 복수 자신은 아니지만 복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다른' 사람(혹은 다른 삶의 방식)일 수 밖에 없었던 복수의 아버지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런 부분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왜 내뜻대로 되는게 없지?" "세상이 다 그래요"라는 복수와 경의 대화였습니다. 정말 세상은 뜻대로 되는게 없지만 그래도 뭐 어떻겠어요. 둘은 그래도 함께 같이 사는데. 이거야말로 이 드라마의 주제를 집약시킨걸지도 모르겠네요.
글 : 강명석(LENNON@hitel.net)
old/old_scrapbook 2003. 11. 1. 04:21
개인적으로 MBC '네멋대로 해라'의 매력중 하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입체적이고 생명력이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각자의 하는 일이 있고, 각자의 삶의 궤적이 있다. 거기에는 복수(양동근)와 전경(이나영)같은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꼬붕(허인범)이나 이 드라마의 유일한 악역처럼 보이지만 그안에는 손가락을 잃고, 그래서 자신의 어린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했던 슬픔을 가지고 있는 박정달(김명국)같은 인물들의 삶이 존재한다. 그래서 '네멋대로 해라'는 조금만 눈을 돌리면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여러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달리하면서 여러 관계들을 맺어나간다.
그래서 '네멋대로 해라'는 드라마의 중심축을 이루는 복수-전경-미래(공효진)의 이야기외에도 보다 다양한 관계들이 성립되며 시청자들이 그것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복수의 병에 대해 알게 된 미래와 복수사이의 대사도 사람을 울릴 수 있지만, 미래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꼬붕(허인범)을 경찰서에 넘기는 장면에서도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사와 씁쓸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네멋대로 해라'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맺는 관계 하나하나가 주인공못지않은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추먹는 모습이 눈물겨운 이유
그리고 필자는 주연배우들을 제외한다면 '네멋대로 해라'의 그 많은 캐릭터와 관계들중에서 복수와 그의 아버지 중섭(신구)의 모습을 가장 흥미있게 본다. 이는 단지 이들이 드라마안에서 보여주는 모습뿐만 아니라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 양동근과 신구가 이 드라마를 통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들 스스로의 상징성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복수와 중섭의 관계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관계이기도 하다. 그들은 단지 혈연으로 맺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동반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중섭은 다른 드라마의 아버지처럼 복수에게 어떤 강제적인 영향력이나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로 여느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처럼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소극적이고 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아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할 뿐이고, 그것을 무조건적인 희생보다는 자신이 아들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가진것도 별로 없고, 소매치기시절 아들을 강력하게 붙잡아 앉힐만큼의 힘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신 아들을 위해 정달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아들의 미래를 위해 헤어진 뒤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아내(윤여정)를 찾아가 복수의 돈을 받지 말아달라고 애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복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100% 만족시키는 아들은 아니다. 그는 소매치기를 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바라는 대학공부는 뒷전이며, 아버지를 여전히 속이고 스턴트맨 생활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속이는 동시에 바로 그런 자신 때문에 마음아파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병보다는 자신이 죽은 뒤 혼자 살아갈 아버지를 걱정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한의 사랑을 아버지에게 표현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네 멋'은 유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는 '네멋대로 해라'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부분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이 둘이 함께하는 모습은 언제나 서로간의 애정과 안타까움이 함께 교차하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잔잔한 감동과 슬픔이 함께한다. 아버지는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앞으로 보상해주겠다는 사랑을 쏟으려하고, 아들은 앞으로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채우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제는 오랫동안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식사를 하는 아버지와 이런 식사의 기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아들이 울음을 참으며 밥을 먹는 이른바 '상추씬'은 주인공들간의 씬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멋대로 해라' 팬들로부터 가장 감동적인 씬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복수와 중섭이 신구와 양동근이라는 배우에 의해 연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동시에 '네멋대로 해라'를 현재와 같은 드라마로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계층의 캐릭터중 가장 전형에 벗어나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면서도 작품마다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줄 아는 연기자들이다. 그들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름을 말하면 그 이미지가 쉽게 떠오를정도로 자신들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노인 캐릭터
신구는 한마디로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민적이면서도 괴퍅하고, 동시에 인간적일 수 있는 노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연기자다. 워낙 연기한 배역이 많기에 그의 연기를 하나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그가 최근 보여주는 연기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노인에 빠지지 않는, 캐릭터에 살아숨쉬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그런 연기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서민계층의 노인 캐릭터를 연기한다. 물론 SBS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그여자 사람잡네'같은 작품에서는 좀더 부유한(?) 노인의 역할을 연기했지만, 그 작품들에서도 그는 좀처럼 '있는집'의 실권을 쥔 노인으로서 근엄하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버려진 쓰레기 하나도 뭔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일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몸에 뱄다. 그래서 더 억척스럽고 강인한 생활력이 느껴지고, 때로는 고집스러울때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더 드라마에서 주변적인 인물이었던 노인의 캐릭터에 살아숨쉬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캐릭터는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구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캐릭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미 수년전 몇편의 드라마에서 일반적인 노인, 혹은 아버지 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는 캐릭터를 자주 소화해왔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안나지만(기억나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신구외에도 강부자, 최명길, 김무생, 이영범등이 출연했던 드라마다. SBS 홈페이지에도 관련 정보가 없어서.. 최근 SBS 드라마넷에서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한 드라마에서 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매우 온화하고 사려깊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할 때는 '웃음 세 번'을 경고수단으로 삼으며 세 번 웃자마자 갑자기 집안을 '엎어버리는' 은근히 공포스러운 캐릭터로 출연했고, 역시 '자전거를 탄 여자'라는 일일 드라마에서는 알부자면서도 목욕탕에 버려진 때밀이 타올을 가져오고, 그러면서도 사리분별에 맞춰 돈을 쓸때는 쓰는, 균형감각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또 영화 '반칙왕'에서는 송강호의 아버지로 출연해 별볼일없이 살아가는 아들을 마구 구박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영화에 활력을 더하기도 했다.
'웬만해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이런 신구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에 좀더 극단적인 면을 부여하면서 신구를 좋은 연기자일뿐 아니라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신구는 그 이름 '노구'(!)가 설명하듯, 정말 어떨때는 '개같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괴퍅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그는 흔히 '뒷방 늙은이'로 표현되는 힘없는 노인도 아니었고, 재산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점잖게 노인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처럼 작은 것에도 집착하고 욕심부리는 한편, 동시에 정말 화가 날때는 몽둥이를 들고 집안 전체를 뒤엎을 정도로 폭력적인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노씨집안에서도 가장 '위험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폭탄같은 존재였고, 에피소드는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구만큼 평범한 서민 가정에 살면서도 극단적인 면을 동시에 표출하는, 순진한 웃음과 쌍욕이 동시에 어울리는 중견 배우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노인 캐릭터의 탄생이었다. 지금까지 작품속의 노인 캐릭터란 노인이 된 현재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그런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노인이니까 엄하고, 노인이니까 무력하다. 하지만 신구가 연기하는 노인이란 산전수전 다 겪은 삶을 통해 나름대로 자신만의 삶의 법칙이 있고, 그만큼 만만치않은 상대이자 동시에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그는 먹을 것이나 공짜에 집착하며 때때로는 가족들에게 왕따를 당하기도 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자기 집안의 재산권을 틀어쥐고 재테크에 능한 모습을 보이며(심지어 주식투자도 한다), 가족들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순간순간 재빠르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노인으로서 주연배우들의 관찰자나 보조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와 비견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배우 이순재가 MBC '동의보감'이나 '상도'에서처럼 카리스마적인 노인 역할이나 '내사랑 누굴까'에서의 엄하면서도 온화한 할어버지역할등 드라마의 성격에 따라 하나로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노인(혹은 나이많은)이 가진 상징성을 연기로 잘 표현한다면, 신구는 한 작품안에 그 모든 요소를 공존시키면서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살아온 서민계층의 노인의 모습을 표현한다.
노구에서 KGB로, 그리고 다시 고중섭으로
또한 신구는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이후 그 캐릭터를 보다 다양하게 응용하면서 이런 독특한 노인 캐릭터를 완성시켜나간다.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그가 연기한 'KGB' 김금복이라는 캐릭터는 단지 힘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실세다. 그는 눈깜짝않고 폭력과 살인을 지시하고, 자신이 가진 부의 위력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모든 이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다. 집안에서는 손자의 생일을 챙겨주는 자상한 할아버지지만, 자신의 이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는 '할아버지'가 아닌 'KGB'가 되어 주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놓는다. 만약 신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음험하고 구렁이같은 교묘한 속내를 가진 노인을 연기할 수 있는 연기자가 있었을까.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백일섭이 어떤 배역을 맡아도 약간의 인간미가 느껴지듯, 신구는 어떤 역을 맡아도 자신이 가진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할줄 아는, 현실적이면서도 약간은 극단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묻어나온다. '그여자 사람잡네'에서도 그는 단지 집안 살림 하나하나에 간섭하는 쪼잔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때론 질책을, 때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대범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할아버지를 연기한다. 그가 연기하는 노인에는 카리스마나 보기만해도 웃음이 나오는 코믹함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대신 한 배역에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있다. 그는 드라마에 잘 융화되면서도, 그 캐릭터의 근원자체는 현실에 기초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신구의 캐릭터는 '네멋대로 해라'에서 또한번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이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하는 고중섭이라는 인물은 냉정히 말해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캐릭터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자식이 소매치기가 되는 것을 막지못했으며, 이제 그 아들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인생에도 삶의 희노애락, 그리고 희망과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 복수가 잘못된 삶을 살았던 것을 막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절대로 아들의 삶의 길을 바꾸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안에서 아들을 위해 돈을 저축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아들을 위한 공부방을 마련한다. 그가 아들에게 주는 우유는 금전적인 가치로는 보잘 것 없지만, 거기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다. 유치장에 갇혀있는 아들을 빼낼 수 있는 힘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그대신 자신이 사람처럼 쳐다보지도 않았던 형사에게 애걸이라도 하는 인물이 중섭이고, 그런 중섭의 캐릭터는 한 캐릭터안에서 수많은 표정을 표현할 수 있는 신구의 연기를 통해 완성된다.
늘 무던하고 착한 듯 하면서도 아들의 양복입은 모습을 보고 아들이 소매치기를 하러 나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불같이 화를 내고, 자신의 아들을 위해 헤어진 전 아내와 만나 감정을 억제한채 담담하게 아들이 소매치기였음을 말하는 중섭의 모습은 그동안 서민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늘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있는 표정을 가진 한 개인의 모습을 연기했던 신구의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정 계층을 연기하면서도 그 계층의 전형성에 빠지지않고 자신의 캐릭터를 작품속에 투영시킬 수 있는 배우가 신구다.
잘생기지 않아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반면 그의 아들 복수를 연기하는 양동근은 그 자체가 이미 캐릭터의 전형성을 깨는 인물이다. 그는 한 10년쯤 일찍 태어났다면 아마도 조연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그런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솔직히 말해 잘생겼다기보다는 악동에 어울리는 모습이고, 그가 맡은 캐릭터역시 기본적으로는 결코 작품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아직 뜨기전 출연한 '학교'나 '광끼', 혹은 '짱'같은 학원물에서나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뉴 논스톱'에서나 그는 언제나 장난끼있고 코믹한 캐릭터를 맡았다. 이런 캐릭터는 작품의 양념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주연을 맡는 것은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양동근은 이런 캐릭터에 자신만의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성격파' 청춘스타가 충분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매력은 '평범한 서민'과 때론 대책없어 보이는 '낙천주의'의 결합에서 나타난다. '수취인 불명'을 제외한다면, 그는 작품속에서 늘 그저그런 능력을 가진 평범한 서민이면서도 결코 웃음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출연한다. 그가 아역시절 출연했던 KBS '서울 뚝배기'에서도 그는 말잘듣는 모범생 아이나 대책없는 악동이 아니라, 장난꾸러기면서도 아저씨 아줌마들과도 말이 잘 통하는(?) 캐릭터로 출연했다. 그다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 특출난데도 없이 간간이 말썽을 피우지만 그렇다고 그냥 떽떽거리는 말썽꾸러기 아이도 아닌, 참 밉지않은, 보면 유쾌한 웃음이 나오는 인물을 연기했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한동안의 성장기를 거쳐 그는 '뉴 논스톱'을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확실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물론 공부못하고 말썽 잘 피우는 캐릭터는 그가 이전에 출연했던 학원물에서도 조금씩 드러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주인공에게만 비중이 집중되는 미니시리즈나 영화에 비해 다양한 인물들에게 비중이 나눠지는 시트콤은 그가 가진 잠재된 캐릭터를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구리구리하지만 낙천적이다
그가 '뉴 논스톱'에서 가진 기본적인 캐릭터는 사실 매우 능력없고 얄미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그대로 '빈농의 아들'이고, 언제 밥한번 제대로 사는적도 없으며, 심지어 남의 물건을 슬쩍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것을 다반사로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쌍'해보인다거나 미워보이지 않았던 것은 양동근 특유의 낙천적인 모습에서 비롯된다. 그의 상황은 사실 무척 비관적일수도 있지만, 그는 그것을 웃음으로 표현한다. '구리구리'하다는 말과 함께 그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남에게 구박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주눅들지는 않는다.
그의 애정문제에 관해 진지한 모습을 띄었던 몇편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늘 화면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심지어 슬픈 장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슬픈 장면 뒤에도 곧바로 '구리구리'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안(?)을 주고 삶의 활력을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뉴 논스톱'속의 양동근이었으며, 이는 다시 가수활동을 통해 양동근 자신의 것으로 확대된다. 앨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솔로 앨범을 통해 '카리스마'대신 넉살좋은 웃음을 내세우면서 일상속에서 유쾌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재미없는 일상에 활력소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절망속의 희망
그리고 '네멋대로 해라'의 고복수는 그런 양동근의 캐릭터에 인생의 깊이를 더한 인물이다. '네멋대로 해라'의 복수는 사실 삶의 희망이라곤 없는 캐릭터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시한부 인생을 벗어난다해도 그는 여전히 소매치기 출신의 초보 스턴트맨일 뿐이다. 가진 것도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암담하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란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지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아보겠다는 희망과 의지이다. 그는 죽어가는 그순간에도 웃음을 잃지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상대방에게 풀기보다는 자신의 혼잣말로 풀어버리고, 자신이 처한 불운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한탄하기 보다는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듯, 오히려 그 다음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복수다.
양동근은 그런 복수의 캐릭터를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고복수이자 양동근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는 남에게 나쁜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끝을 흐리면서 어눌하게 표현하는 그의 억양을 통해, 그리고 때때로 보여주는 그의 공허한 눈을 통해 형상화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울고 웃지만, 그 속에는 그순간에도 늘 남을 걱정하며 자신의 주장은 조금씩 마음속에 담아놓듯, 늘 조금은 상대방이 그의 말에 파고들 여지를 남겨두는 그의 대사와, 순간순간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공허한 눈빛을 담아내는 그의 표정연기가 있다. 그는 참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느끼도록 만들만큼 한 개인의 캐릭터에 깊은 감정이입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평범하고 별볼일없는, 심지어 반항적이지도, 그렇다고 멋진 외모를 가진 것으로 설정되지도 않은 캐릭터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가지게 만든 것은 양동근이라는 배우가 가진 힘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배우들이 흔히 걷게되는 전형을 따라가는 대신 더욱더 자신이 가진 캐릭터를 작품속에 강하게 이입함으로서 오히려 각각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네멋대로 해라'이후 너무 비슷한 캐릭터나 연기의 톤을 반복하는 것을 주의한다면, 양동근은 어쩌면 한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성격파 배우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흔치않은 배우다.
그들만의 캐릭터
세상에는 수많은 배우들이 있고, 그 배우들은 보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더욱더 멋진 배역을 얻기 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과 연기력을 가지고, 오직 자신만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배우들은 더욱 가치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네멋'에 사는 배우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 아니겠는가. '네멋대로 해라'라는 작품자체가 주는 재미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그리고 앞으로 대표할지도 모를 살아숨쉬는 자기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신-구 성격파 배우를 한 작품안에서 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글 : 강명석(LENNON@hitel.net)
old/old_scrapbook 2003. 11. 1. 04:20
MBC '네멋대로해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 매력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일일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에 열광적으로 빠진 사람들은 서로 그 드라마가 매력적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들은 그 드라마가 왜 자신과 주파수가 맞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혹은 그전날 방영된 내용중 약간의 장면이나 대사만 말해도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금새 이 작품을 다시 보듯 감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왜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인지 '말'만 들어서는 이해하기 쉽지않다.
과연 어떤 장면과 어떤 대사를 통해 이 작품의 매력을 설명할 것인가, '네 멋대로 해라'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좋아해도 되요?" "네"라는 대사가 왜 그렇게 감동적인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에 앞서서 설명하려는 쪽에서 과연 무엇으로 이 드라마가 주는 감동을 표현할 수 있을지 말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멋진 요소들중에 어떤 캐릭터, 혹은 어떤 대사나 장면을 이야기해야 될 것인가, 또 그런 선택속에서 빠져버린 것들은 아까워서 어떻게 하는가. '네멋대로해라'는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만 즐기거나, 아니면 아예 녹화한 테이프를 몽땅 안겨주면서 보라고 해야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네멋대로해라'라는 이름의 세계
이것은 이 드라마가 단지 좋은 대사와 좋은 캐릭터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대사와 캐릭터를 모두 '좋은' 것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관, 즉 '네멋대로해라'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일관적인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어떤 한 배우의 매력이나 스토리의 흡인력이 이끌어나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드라마속의 모든 캐릭터와 하나하나의 대사, 장면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룰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 하나씩 짚어나가볼 필요가 있다. 다른 드라마들은 일단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에 필요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다음,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조연들을 캐스팅해서 그 스토리에 살을 붙이면 드라마가 완성되고, 하나의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만 이 드라마는 각각의 요소가 빠진다면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그 전체적인 분위기가 빈약해지거나, 혹은 시청자들의 감정을 이입시키기 힘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네멋대로해라' 특유의 세계관은 드라마의 주인공인 복수(양동근)와 전경(이나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이 두 인물이 단지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가지고 있던 각각의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에 비해 조연들, 정확하게 말해 주인공 각자가 아닌 다른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은 드라마이다.
예를들어 SBS '순수의 시대'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삶의 반경이란 결국 등장인물들, 그리고 거기에 주변인물로 등장하는 몇몇의 조연 뿐이었다. 그들은 말그대로 '회사원 A'나 '가족 B'로 불려도 상관없는 캐릭터들인 것이다. 태석(고수)의 회사동료나 동화(박정철)의 부모에게 있어 각자의 스토리가 있을리는 없고, 태석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도 각자의 스토리는 있어도 서로간의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멋대로해라'에서 복수와 전경은 상대방뿐만아니라 각자가 몸담고있는 여러 세계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어나간다. 그들은 각자 스턴트맨과 인디밴드의 멤버로 살아가고, 동시에 한 가족의 성원으로서 살아간다. 복수는 전경과 사랑도 해야하지만 스턴트를 하는 곳에서는 자신에게 뇌수술을 권하는 레지던트 출신의 의사, 그리고 자신을 받아준 스턴트 사장(정두홍)과의 실랑이도 벌여야하며, 아버지(신구)와 어머니(윤여정)을 오가며 착한 아들 노릇도 한다. 전경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인디밴드의 여러 가지 문제들, 심지어는 무대에 제대로 서지 못하는 새로운 보컬들을 다독이거나 앨범 취입의 문제도 신경써야 하고, 집에서는 아버지와 싸워야하고 어머니와는 '놀아줘야'하며, 올케의 투정도 들어줘야 한다. 그들은 단지 드라마속 설정상의 직장동료나 가족이 아니라 함께 여러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며, 그래서 '네멋대로해라'의 세계는 그 범위가 매우 넓어지고, 동시에 각 인물들은 매우 일상적이며 다면적인 모습을 갖게 된다. 그들은 사랑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자신의 일들에 대해서 일희일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이것은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전형적인 캐릭터설정을 벗어나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설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몇몇 설정에 의해 성격을 만들 필요없이 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각자의 캐릭터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라이프스타일'과 성격, 혹은 그 사람의 품성을 분리시킬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인디밴드의 멤버에 술담배를 자연스럽게하고 동진(이동건)에게 남자와도 잤다고 말할 수 있는 전경은 기존의 드라마대로라면 우울하고 반항적이며 다른사람들이 돌봐줘야할 인물에 매우 직설적이고 성적으로 개방적이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남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인물이고, 동진의 대쉬에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으면서도 "우리 사귀는건가요?"라는 식으로 약간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며, 복수와 사귀면서도 미래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면서도 복수와의 만남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기존의 드라마라면 모순될수도 있는 캐릭터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일상적인 모습들을 통해 각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그런 행동들에 대한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일상성을 내세우는 대신 강한 스토리와 몇몇 주요 인물들간의 관계로 작품을 이끌어가는 드라마들이라면 여자가 술담배를 한다는 것자체로 그 여성의 캐릭터를 설명하려 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전경이 피우는 담배는 전경이 겪는 다양한 일상속의 한부분일 뿐이며, 그것이 전경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경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한가지 요소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사람성격이 어떻건간에, 정말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렇게 걸어다니면서 소주팩을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걸 다 뒤로하고 과감하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두사람이다
이 드라마에서 독특한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그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을 한 '개인'의 설정으로 두지않고 그것을 그 사람이 속한 세계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간의 대화와 행동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아나가는 것을 통해 이뤄나간다는 점인 것이다. 이는 전경뿐만 아니라 복수도 마찬가지다. 그가 소매치기이면서도 그의 소매치기 짓이 마치 '범죄'라기보다는 그의 직업에 가까워 보이고, 그가 전경을 만나기전에도 이미 밝고 착한 성격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다양한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들이 그가 '착한 소매치기'라는 어딘가 어긋나보이는 캐릭터를 충실하게 구축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 복수와 전경의 만남은 단지 두사람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두세계의 만남에 가깝다. 그들은 각각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가장 부유한 계층, 그리고 가족의 형태가 깨어져있는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대조적인 환경속에서도 근본적으로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능력없고 미래도 불안정한 상태이고, 스턴트맨과 인디밴드 멤버라는 특별한 일에 매달리며, 이들모두 이복형제가 있다. 또한 복수의 어머니는 복수의 아버지와 이혼해서 나가있는 상태이고, 전경의 어머니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전경의 아버지와 부부생활을 하고 있고, 복수의 이부형제는 남동생인반면 전경의 이부형제는 남자오빠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고, 그런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 그리고 두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상대방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네멋대로해라'속 사람들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마초적이고 위압적인 모습으로만 보였던 전경의 아버지나 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전강같은 인물들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돈만 아는 여자일 것 같았던 복수의 어머니가 어느틈엔가 복수나 전경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하나의 표현방법일뿐 자신들역시 희노애락을 가지고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 과정, 전형적이거나 별나기만 할줄 알았던 사람들의 밑바탕에 있는 그 '인간적'인 모습들이 이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에 의해 표현되면서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가 매우 잔잔한 일상들, 극단적인 사건보다는 대사 하나하나와 여러 소품들, 그리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그 사람들의 캐릭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독특한 드라마로 완성되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듯 싶으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용해된다.
복수의 뇌종양을 알리는 의사출신 스턴트맨은 뇌종양을 말하면서 미소를 짓고, 미래의 동생은 한참 오빠뻘인 복수에게 마구 반말을 하는데다가 기분나쁘면 숟가락을 마구 물어뜯을 정도로 독특한 일면이 있지만, 그들은 회가 진행될수록 복수의 병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그의 뒤를 돌봐주고, 미래를 위해 복수에게 미래에게 돌아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는 사람이 된다. 각각의 모든 캐릭터는 각자의 사연과 희노애락이 있고, 그 모습들이 이 세계를 모두 경험하는 복수와 전경의 행동반경안에서 조금씩 쌓여나가면서 하나의 '사람'으로 다가설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드라마들이 주연과 조연을 나누고, 그 조연들을 분위기전환의 '도구'로 삼았다면, 이 드라마는 모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이 비일상을 만나는 순간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의 일상성이나 거의 모든 인물에 걸쳐 존재하는 입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그렇게 세밀하고 탄탄하게 만들어낸 세계위에서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환타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결코 삶의 현실성이나 일상성에 대해 찬미하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그런 삶의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제공하려하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복잡하고 고단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네멋대로해라'에서 복수와 전경은 그들을 둘러싼 환경뿐만아니라 또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일이면서도 가장 비일상적인 것같은 이 죽음을, 전경은 밴드를 함께했던 친구를 통해, 복수는 바로 자신의 뇌종양선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는 미래가 없어보일뿐만 아니라 그들은 늘 괴로운 가족사에 직면해야한다. 그런데 그순간 죽음을 직면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그 죽음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복수는 어째서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고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내기는커녕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가, 또 전경은 어째서 자신의 동료를 간접적으로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복수를 좋아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들이 거기서 자신의 불안하고 꿈없는 현실에 대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수는 자신의 잘못된 인생을 스턴트와 전경에 대한 사과와 사랑으로 조금이라도 고쳐나가고 싶어하고, 전경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도 자기 편을 들어줄 수 있는 복수에게서 반복되는 삶의 해결책을 찾는다. 현실은 더할 수 없이 복잡하고 암담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아나가는 순간, 그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착실하게 쌓인 일상이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일상을 통해 만들어낸 '납득할 수 있는' 환타지인 것이다. 각박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느낄수는 있는 그 구원의 빛을 보았을 때, 그것은 어떤 드라마틱한 갈등을 담은 환타지보다도 더 사람에게 위안과 감동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솔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인물들간의 갈등관계나 어떤 특정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인물들과 사건속에서 살아나가는 등장인물들의 의지와 그들의 마음에 대한 그들자신의 솔직함이다. 이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가겠다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속에 담겨있는 자기마음의 솔직함 하나를 믿고 살아나간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복수와 전경은 서로 사랑한다해도 복수로인해 전경의 친구가 죽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주위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서로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면서 서로 괴로워했어야 한다. 아니면 복수는 뇌종양때문에라도 전경을 멀리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전경은 복수를 좋아하고, 복수는 뇌종양에도 불구하고 미래대신 전경을 선택한다.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감정의 흐름이다. 만나고 싶으면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만나야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상황이 되든 해야한다. 중요한건 어떤 도덕이나 자신의 현재위치, 혹은 교과서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전경은 동진에게 자신의 복수에 대한 감정이 영원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보고싶다고, 옛사랑은 2주가 지나자 잊혀졌지만 복수는 3주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너무 보고싶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현재 감정에 충실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벌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솔직함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솔직함에 충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비전형적인 캐릭터가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복수의 어머니나 전경의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자식을 아끼고, 또 자신의 아내를 끔찍히 여기는 것만큼은 진실이다.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속이기보다는 자신의 캐릭터안에서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서 이 드라마가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들이 가진 전형성을 깨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복수와 전경이 우연스럽게 만난다해도 그것이 그다지 억지스럽지않게 느껴진다면, 혹은 오히려 더 자주 만나길 빌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두사람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이 세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우연히 만난다는 그 사건자체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보고싶어하는 솔직한 마음이 그들을 만나게하고, 그들이 떨어져있는 곳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솔직함이 일상과 만나면서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방법을 갖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 솔직함이란 자기 감정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자, 그 감정을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는 솔직함이기도 하다. 과연 일상속에서 늘 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의 감정에는 목숨을 다 주어도 아깝지않은 사랑이 있을수도 있고, 그저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랑도 있다. 그것을 그저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거리는 것은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하다. 현실속에서 과연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오직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늘 그 순간에 느껴지는 솔직한 마음을 느껴지는 만큼 일상의 대화와 행동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보다 정직하게, 그리고 보다 솔직하게 전달한다. 자신의 아버지에 맞서 자신을 변호해준 복수에게 고마움을 느낀 전경의 마음은 그렇다고 복수에게 직접적으로 그 고마움이나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혼자 방에서 포도씨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는 있다. 또 전경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동시에 소매치기에 보잘것없는 복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좋아해도 되나요?"라고 물을수는 있는 것이다. 이들은 솔직한만큼 거칠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하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도 솔직하기 때문에 더욱더 섬세하게, 그리고 일상의 대화와 물건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딱 자기가 하고 싶은말, 하고 싶은 행동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약속장소로 나오지않은 복수 때문에 복수가 준 파이프를 버렸다가 다시 주우면서 담배를 다시 피워야겠다고 얘기하는 전경의 말과 행동에서 표현되는 전경의 그당시 마음을 이것외에 그순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고복수 나쁜자식? 아니면 저주할거야? 그건 전경의 입장에서는 솔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처럼 거칠고 폭력적인 표현, 사람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는 다른 캐릭터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의 일상성이 캐릭터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면, 이 솔직함은 그런 다면적이고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는 기본전제이다. 평소에는 얌전한 전강의 아내는 미래와 대면하면서 갑자기 욕을 하고, 반대로 복수를 거의 지배하듯 다뤘던 미래는 복수가 자신을 떠나려하는 순간 복수에게 자신이 어떻게든 전경과 닮으면 안 떠나겠냐고 이야기한다. 얼핏보면 각자의 캐릭터와 모순되어 있는 듯, 혹은 예측불허인듯한 모습으로 생각될수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작품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바탕에 각자의 마음에대한 솔직함이 있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나는 나"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것을 자신의 표현방식대로 보다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말에 복수가 대답한대로 누군가를 따라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없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네멋대로해라'속의 세계에서 각자가 각자의 개성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삶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솔직함 때문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에 대한 섬세한 표현때문인 것이다.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네"같은 드라마에서 '가장 직설적인' 감정표현을 하는 전경의 말이나, 복수에 대해 "내 자식이지만 고와"라고 말하는 복수 어머니의 말이 모두 '혼잣말'인 것은 그들 감정의 솔직함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그 감정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는, 혼자일뿐인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좋은사람은 외롭지않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이 드라마의 세계가 '나'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타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모든 인물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것이다. 복수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생에대한 미련뿐만 아니라 혼자될 부모가 걱정되서이고, 전경이 동료멤버의 죽음에서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그녀의 죽음으로인해 평생을 혼자살아야하는 그녀의 어머니 때문이다. 또 전경의 어머니와 올케는 전경이 없으면 자신은 혼자일 수 밖에 없다며 전경에게 매달리고, 미래의 동생은 복수에게 복수가 없다면 미래는 외로워진다며 그에게 돌아올 것을 사정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괜찮지만, 자신이 혼자되는 것만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솔직한 것 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극 초반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왔던 전경의 아버지나 복수의 어머니정도를 제외하면, 아니 그들도 점점 그들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이 드라마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캐릭터안에서 최대한 서로를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경의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대로 돈을 주고 어머니에 대한 당부를 잊지않으며 전경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스턴트회사의 사장은 복수를 '전과자'로 말하지만 그를 받아주고 하나의 스턴트맨으로 인정하면서 그와 꼬붕이의 출연을 배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미래는 전경과 복수에게 애증이 겹친 복잡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들에게 약간의 욕을한다해도 전경이 복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모욕하거나, 복수를 '바람핀 놈'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서로의 감정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설혹 마음에들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이 드라마를 상징하는 두 주인공 복수와 전경의 모습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에는 솔직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남에게 말할때만큼은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려한다. 그들은 서로 좋아해서 만나기까지하지만 미래가 오면 정말 무슨 죄나 지은 듯 도망치고, 그들은 미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차피 사귀기로 한거 뻔뻔하게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마음을 상처받게 하는 것이 최대의 '악행'이 되는 이 드라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해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경은 자신과 가장 대립관계에 있었던 아버지에게마저도 정말 '귀여운' 방법으로 반항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달되어 점점더 각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나간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헐뜯고 할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의 동료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을 '전과자'라고 이야기하는 형사가 등장하는 순간 전경의 태도가 돌변하며 전경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상대방의 신체적 약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형사가 솔직하기는 하되 상대방의 배려라는 이 세계의 원칙을 깬, 전경의 표현 그대로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멋대로해라'중 지금까지 방영된 장면들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복수가 뇌종양선고를 받은 것이나 전강의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가 미래에게 "너가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그 말을 하는 복수의 모습은 전경과 사귀기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고, 동시에 미래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솔직함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네멋대로해라'의 세계관을 그대로 어긴 것이다. 그리고 그순간 이 드라마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이 되어버리면서 갑자기 '잔인'해지는 드라마가 된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숱하게 나올 수도 있는 그말이, 이 드라마에서는 드라마의 세계관, 혹은 분위기를 깨자마자 가장 충격적인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네 멋'이라는 결코 하고 싶은대로 무작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대로, 마음이 시키는대로하되 결코 타인의 존재를 잊지말고, 그들을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멋'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순식간에 외로운 사람들이 되어버릴테니까.
눈물가득한 세상에서 희망을 얘기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환타지이면서도 그 방향이 여타 드라마와는 매우 다른 드라마가 된다. 이 드라마속의 인물들은 분명히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인물들이다. 아무리 현실이라 해도 이들처럼 살아갈수는 없다. 매우 자기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표현에 있어 섬세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까지 아끼지않는 이 드라마속 인물들의 삶은 하루에도 몇번씩 고민과 짜증이 동반되는 삶을 살아야하는 실제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도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표현된다. 무언가 조금씩은 이상하게 보이는 캐릭터들처럼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을 것 같은 캐릭터들도 그렇고, 복수가 물을 버리는 장면에서 카메라 화면을 젖게 하는 씬도 마찬가지다. 이 씬을 통해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잘 만들어진 욕실에서가 아니라 집 앞마당에 앉아 물을 버리는 사람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경계에 서있는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이것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한 영화 '네멋대로해라'를 만든 누벨바그의 기수 장 뤽 고다르가 영화에서 영화의 가짜 현실을 뚫는 방법으로 사용한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이후 영화는 '새로운' 영화가 되었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환타지적이고, 드라마에서도 환타지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환타지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느냐는 것이다. 기존의 드라마들이 환타지를 보여줌으로서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솔직함'보다는 최대한 일상적이지 않은 강렬한 대사들과 캐릭터로 드라마를 이끌어나간반면, 이 드라마는 일상을 통해 환타지를 만들어내고, 그 환타지를 통해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금씩이나마 이렇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착하고 솔직하며, 상대방을 배려할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아름답고 꿈같은, 그러나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세계의 창조는 '네멋대로해라'의 수많은 매력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자, 한국 드라마가 겪는 리얼리즘과 환타지사이의 괴리를 자기만의 세계관으로 극복해나간 새로운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그래서 눈물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짓는 웃음은 그 어떤 격정적인 말들과 극적인 스토리보다 감동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트랜디' 드라마의 정의를 다시 그 원래의 의미로 되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트랜디 드라마란 원래 일상에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스토리나 강렬한 캐릭터를 멋있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트랜드, 좀더 좁게 말하면 그 트랜드를 이끌어가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감성과 라이프 스타일을 재빠르게 잡아내서 그 당시의 정서를 보여주며 호응을 얻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요즘의 트랜디 드라마는 정서나 스토리라인은 큰 변화가 없고, 대신 '명랑소녀 성공기'나 '로망스'처럼 일정하게 짜여진 틀 안에서 캐릭터를 바꾸는 것정도로 발전을 해왔으며, '순수의 시대'처럼 배우들만 젊은 배우들일뿐 스토리자체는 매우 통속적인(그러나 매끈하게 잘 다듬은)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정말로 요즘의 트랜드, 혹은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 새로운 정서를 내세운다. 그것은 착하고 소심한 사람이 오히려 더 '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각박한 현실에 있어서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전경과 복수의 살아가는 방식을 닳고닳은 언론인인 동진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리고 동시에 그가 소개시켜준 음반사 인물들이 전경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착하고 소심해서 남에게 심한 말도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보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기 위해 말 한마디한마디에도 고민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캐릭터들은 사건의 진행을 막고, 점점 이야기를 답답하게 이끌어나가는 캐릭터가 된다. 그러다가 '나쁜사람'에게 상처받고, 상처받아도 말도 못하다가 결국엔 그게 한꺼번에 터지면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게 기존의 드라마였다.
반면 이 드라마는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그러나 직설적인 표현대신 끝까지 일상성에 근거를 둔 알 듯 모를듯한 간접적인 대사들로 마음을 표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그 섬세한 감정들을 더 쿨하고 멋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헤어졌던 전경과 복수가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들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이 '네멋대로해라'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은 그 말들 사이에서 오가는 그들의 '솔직하고 정확한'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대사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속에서 어떤 사랑고백보다도 짜릿한 로맨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저 보고싶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서로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그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쿨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직설화법보다도 훨씬 더 쿨하다.
착한 것이 쿨할 수 있다
'네멋대로해라'는 기존의 쿨한 것, 트랜디한것에 드라마를 맞춘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이것이야말로 요즘 세대의 진정 쿨하고 트랜디한 정서라고 말하는 드라마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모든 쿨한 것을 '내맘이야'라는 하나의 말로 뭉뚱그려서 거침없이 사는 사람도 있지만, 똑같지는 않아도 이렇게 '소심하고 착하며 섬세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에서는 '순수의 시대'와 비슷한 시청률을 기록해도 이미 온갖 인터넷 게시판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지금까지 묻혀있던 어떤 사람들의 정서를 정확하게 집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음악으로 치면 눈물을 있는대로 짜내는 신파적인 발라드 사이에서 어느날 갑자기 토이같은 음악이 인기를 끈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또한 '네멋대로해라'는 개념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물에 있어서도 기존 드라마를 넘어서는 빼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네멋대로해라'는 자신이 말하고자하는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일상을 바탕으로하기에 그것은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일상속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대사들에서 미처 다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간의 감정들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매우 절제된 상태에서 나타난다. 포도씨로도 사람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 유명한 장면부터 복수가 미래와 전경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교차편집등은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세련되고 절제된, 영화를 연상시키는 영상들이었고, 그렇게 절제된 영상들은 그 영상들속에서 '심사숙고' 끝에 나오는 대사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그리고 대본에 있어서도 이 드라마는 그 유명한 대사들뿐만 아니라 몇몇의 캐릭터에게 이 드라마의 내용을 부분부분 함축시키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쉽게 넘어지는 꼬붕이의 캐릭터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활달하다가도 무대에만서면 노래를 부르지못하는 밴드의 보컬리스트는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너무나 착하고 동시에 소심해서 이 '세계'를 벗어난 타인앞에서는 잘 나서지 못하는 '네멋대로해라'속 대부분의 인물들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마치 복수가 기르는 물고기처럼 혼자서는 살기 힘들고 뭔가 하나씩은 부족한듯한 사람들, 그러나 서로 도와가며 공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창조적이고 완결된 멋진 세계와 그 세계관을, 이 드라마의 대본은 으시대지 않고 그 드라마속 인물처럼 차분하고 절제된, 그러나 시청자들은 그 감정선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연기의 완성도
물론 이런 드라마의 완성도는 단지 대본과 연출의 완성도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의 최종적인 힘은 결국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에서 나온다. 곧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삶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의 복잡한 심리를 어눌하고 느린 대사톤을 유지하면서도 말그대로 '복잡다단'하게 표현하는 양동근의 연기는 그의 '구리구리'했던 캐릭터속에 가지고 있었던 가진것도, 볼것도 없는 청년의 모습을 일정부분 유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금 당장 찾아온 행복사이에서 복잡다단한 감정표현을 자신만의 캐릭터안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고, 이나영역시 더 이상 'CF모델'로 불릴 이유가 없을 정도로 일상의 연기를 잘 소화하고 있다(술마시고 아버지에게 주정부렸을때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오히려 주연배우들의 연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주변에 있는, 이 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조경환, 신구, 윤여정같은 연기의 달인들의 기막힌 연기은 어느정도 예상된 것이지만, 스턴트 회사의 사장으로 '네멋대로해라'속 '착한사람'의 모습을 한층 더 풍부하게 보여주는 정두홍이나 극중초반 지명도에 있어 너무 밀리지않았나 싶었던 이동건과 이세창의 연기역시 인상적이다. 특히 이동건이나 이세창의 캐스팅은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스타 연기자들을 쓰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만약 이 배역에 애초에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타를 캐스팅했다면 이 역할들은 그 설득력을 잃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말투나 성격에 있어서 '착하게 보이는' 사람과 '나쁘게 보이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재수없고 무식해보이는 사람들마저도 '구제'하며, 그들도 사실은 착한사람들이라는, 다만 표현의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Best in 2002 ?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네멋대로해라'는 올해 나온 드라마중 현시점에서 가장 '소중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완성도가 문제가 아니라, 드라마하나가 스스로 세계와 세계관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삶의 자세'를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 장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연출과 대본, 그리고 연기까지 모두 수준급이니 그런 평가를 받아도 좋지 않을까. '네멋대로해라'는 드라마속에서 새로운 세계, 그것도 착한 사람들이 타인과 공존하는 희망가득한 세계를 절망과 불안의 세계속에 담아내고, 그런 아름다운 삶의 당위성을 이야기함으로서 한국의 트랜디 드라마가 진정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신의 마음가는대로 해라. 그게 '네 멋'이다. 하지만 그 '네 멋'은 타인과의 사려깊은 공존으로서 완성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에도.
글 : 강명석(LENNON@hitel.net)
old/old_scrapbook 2003. 11. 1. 04:19
태양을 향해 쏴라 - 비
이제 한국 대중 문화의 중심은 드라마가 꽉 잡아버린 느낌이다.
불과 몇 년만 해도 어디 나가서 “저… 드라마 즐겨봐요” 라는 말을 했다간 교양 없고, 문화 생활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으로 찍히기 일쑤라, 어찌 됐건 “클래식 음악 좋아 하구요…”로 첫 마디를 떼고, 괜히 몰라도 아는 척 “아…^^ 요즘은 자기 전에 드비쉬 음악을 켜놓고 자야 잠이 잘 와요.” 라고 말을 해야 뭔가 지적인 향기를 풍긴다고 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져 버렸다. 지금은 클래식 좋아한다고 그랬다간 뭔가 배운 집 자식 티 낸다고 왕따 당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늘 상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켜면 언제든지 볼 수 있어 왔고 가까운 자리에 있었기에 더더욱 하위 문화쯤으로 취급 받아왔던 드라마가 이제는 한국 대중 문화의 안방 마님으로 떡 하니 들어서 버린 것이다.
방송국 대비 드라마 편수로 따졌을 때 세계 최강이라는 드라마 왕국답게 한국의 드라마들은 많은 제작 편수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 수준이 상상외로 높아졌으며 또한 인터넷 왕국 한국답게 대중들의 까탈스러운 요구들이 드라마 제작 환경에 인터랙티브한 영향을 끼치면서 퀄리티와 시청자 만족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드라마를 보는 것이 쪽 팔리거나, 교양 없는 일이 아닌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한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드라마를 안보고는 얘기가 안 통할 정도가 된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이라면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저녁 10시대 드라마를 단 한편도 보지 못했는데 그 당시 ‘다모’를 전혀 보지 못한 탓에 퇴원한 후 한 동안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일이 있다. 병원에서 막 퇴원한 나에게 대뜸 하는 말이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였고, 대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막막해 하고 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다음 번에 만난 사람 역시 또 한다는 말이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였다. 대체 이 사람들이 뭐 하는 짓인가 물어봤더니 “우리는 아직도 황보 윤 나으리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있소…” 이러면서 하루죙일 다모 패러디만 하고 앉아 있는 거였다-_-;
음악이 대중 문화의 중심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던 나에겐 조금 배아픈 얘기지만 영화, 음악 등의 모든 대중 문화를 제치고 드라마가 현재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기운은 누구보다 먼저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미치기 시작하여 가수들 또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드라마 출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가수 하나만 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쇼 프로그램 무대에 올라 스타일 구기지 않고 자기 무대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가수들이 상대 배우들과 치고 박고 하면서 스타일 구기는 것 따위 상관하지 않고 드라마 출연을 하겠다는 건 돈 이상의 이유가 있는 거다. 가수만 갖고는 인기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위기감에서다.
가수와 탤런트. 누가 더 낫다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 영역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지만 가수 그 이전에 연예인으로서 최고 자리에 우뚝 서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탤런트가 더 이상 남의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고, 가수 한답시고 얌전 빼고 있을 수 만은 없었을 게다. 연기 못한다고 시청자 옴부즈 코너에 글이 수백 건이 올라온다고 해도 대중 문화의 중심을 드라마가 쥐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을 테다. 어차피 댄스 뮤직 하다가 댄스 뮤직 시들해지면 안 되는 목소리 꺾어가며 R&B도 흉내내보고 이것 저것 변신해보는 게 그 바닥 가수들의 생리인데 탤런트라고 못할 쏘냐.
그리고 가수 비 역시 처음 드라마 출연을 한다고 했을 때 그 틈을 타서 무임승차 하는 걸로 보였다. 비는 [나쁜 남자] 1집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2002년의 신인상까지 탈 정도로 잘 나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03년으로 넘어오는 동안 그는 그 좋았던 잔상들을 휘발해 버리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귀엽게만 보이던 눈 웃음은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예의 뻔한 동작으로 기억될 참이었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0점 만점형 미소는 더 이상 매력이 아닌 식상한 것으로 기억될 참이었다. 게다가 2003년, 춤 잘 추고 깨물어주고 싶게 미소 짓는 세븐이 등장하며 비가 차지하고 있던 누나들의 메모리 영역에 어느덧 상주해 버렸고 노래 잘 부르는 또래 가수 영역은 휘성이 건재하게 지키고 있어서 까딱 잘못했다간 비는 그 틈에 끼여버린 어정쩡한 가수로 컴백해 버릴 참이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 출연 불발로 인해 2집 작업이 지연되는 동안 그는 최배달도 아닌 정지훈도 아닌 모습이 비에 섞여 점점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그 순간 비가 내민 카드는 탤런트로서의 컴백이었다. 대중 문화의 꽃이 되어버린 드라마에 당당 주연으로 컴백 말이다. 그것도 드라마 제목에 이름까진 내건 주인공 차상두 역할을 맡으면서 말이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너무 달콤하고 좋은 조건이지만 자칫 발을 잘못 내딛었다 드라마라도 망했다간 그 모든 죄 값을 혼자 뒤짚어 쓰게 생긴 주연.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월요일 화요일 저녁, 탤런트로 컴백한다던 비는 온데 간데 없고 상두만이 남아 티비를 휘젓고 다닌다. 차보리를 애지중지 키우는 철없는 아빠로, 그리고 첫사랑 은환이를 만나기 위해 어떻게 든 학교에 나가야 하는 상두로, 온갖 시련을 헤쳐 티비 안을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웃게 하고 또 울게 한다. 가수가 연기한다는 부정적 편견을 머리에 떠올리기도 전에 그는 상두에 스며들어 비를 잊게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드라마의 내용에 빠져들어 매회 마다 상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던 가수 비는 그 타이밍을 놓히지 않고 가수 무대로 뛰어올라 상두의 스토리를 비의 에너지로 환원해 낸다.
좋은 드라마 속에 녹아 든 탤런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네 멋대로 해라’의 이나영, 양동근이 그랬고 ‘다모’의 이서진, 하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드라마 밖에서도 마치 그때의 눈빛으로 그들이 살아 숨쉬고 있고 또 그것을 지켜 보면서 그때 내가 봤던 건 드라마가 아니라 그들이 진짜 사랑했고, 간절하게 나마 살아있던 순간의 일부 였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경험처럼 상두를 본 사람들은 비의 눈빛 속에서 상두를 꺼내 읽고, 비가 상두였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두가 비였다는 낯설고도 당연한 경험을 느끼며 비가 서 있는 무대를 보고 그 스토리를 읽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수로 돌아온 비는 예전보다 몇 배 강해진 모습이었다. 가수가 싸움꾼도 아닌데 강해졌다는 말은 조금 웃기지만, 정말 그는 사람들을 모두다 깜짝 놀라게 했던 연기 실력에 눌리지 않을 만큼 몇 배 달라진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립싱크 가수들은 다 코 박고 죽어야 되고, 법으로라도 정해 가수들은 라이브로 노래 부르게 시켜야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강경하게 라이브, 라이브를 부르짖을 때마다 내가 한 말이 딱 하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난 알아요’를 들고 나와 강력한 춤과 립싱크로 노래 부르며 사람들을 홀딱 반하게 한 이후부터는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런 류의 가수들이 떼거지로 등장했던 것처럼, 라이브로 멋진 노래를 부르며 춤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가수 하나가 나와 대중들을 놀라게 하면 그 순간, 그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결국 모든 가수들은 그 가수의 기준에 맞춰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맨날 고만고만한 가수들이 춤 동작 소화해내느라 립싱크로 입만 벙긋대거나, 겨우 억지로 방송국에서 라이브 시켜서 마이크를 입에 걸었지만 개미 소리 만한 불안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재미없게 하는 게 너무 유치해서 좋은 노래에, 춤도 잘 추고, 호흡 버거워 하지 않으면서 노래 하는 가수가 등장하면 그 순간부터 그게 유행이 되고 그게 법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이 말은 춤도 추면서 라이브로 노래도 잘 부르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형의 가수는 억지로 시킨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수 하나가 독하게 마음 먹고 춤이랑 노래랑 완벽히 소화하며 대중을 깜짝 놀라게 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라는 말이었는데, 그 가수가 바로 무대 위에 서 버린 것이다. 그걸 해내고도 상두처럼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헤벌래 웃고 있는 그 녀석이 바로 비다.
다른 기라성 같은 가수들에 비해 비가 노래가 좀 떨어질 순 있어도 적어도 자기 앨범에 녹음한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면서 춤도 거침없이 소화해내며 무대를 장악해내는 비는 지금 비디오형 가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내고 있다. 예전보다 몇 배 강해진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라이브로 노래도 부르면서 춤도 잘 추는 데 만약 노래가 후지면 대략 낭패.
그러나 비의 타이틀 곡 ‘태양을 피하는 방법 Gtr remix.’은 애절함 속에 슬픈 아픔을 꼭꼭 눌러 담는 듯한 곡 분위기로 비라는 현재에 적당히 녹아 들어 간다.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한 편으론 아픈 구석을 숨기기 위해 더 환하게 웃어야만 했던 한 사내. 슬픔을 감추기 위해 웃는 법을 배우고 때론 그 표정을 숨기지 못해 웃음이 너무 인공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비라는 현재의 캐릭터에 제대로 죽을 맞춰주는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비에게 새로운 도약기를 제시한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오리지널 버전은 리듬의 촉수를 더욱 내리 깔고 조금 더 그루브한 리듬을 찍어대고 있지만 방송용 버전인 Gtr remix에서는 스팅의 ‘Shape of my heart’를 연출하는 기타 프레이즈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곡의 스산한 매력을 한 꺼풀 벗겨낸다. 그리고 이 곡에서 사운드 믹싱은 다른 채널의 악기 소리보다 비의 목소리 그 자체에 70% 가량의 비중을 실어주며 곡 자체의 다른 편곡에 기대지 아니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비가 노래하는 멜로디의 감정과 숨소리, 그리고 가사에 집중하게 끔 유도한다.
그간 프로듀서 박진영이 써온 노래의 가사들은 불온하고 천박하고 선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사실 그건 사람들이 얘기하기 좋아하는 몇몇 곡들이 섹스를 사랑의 한 방법으로 소재 삼아왔을 뿐 박진영의 기본적인 바탕엔 사랑을 하는 방법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박지윤의 ‘환상’에서 써 내려간 기가 막힌 노래말과 god의 ‘거짓말’ 등을 들어보면 사랑이라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질문을 어리석게도 계속 뒤 돌아서서 묻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도 곡의 가사와 그 가사에 닥친 얘기를 마치 자신 앞에 닥친 일인 것처럼 숨소리마저 아픔에 묻어나게 하는 비의 목소리가 그 포인트이고 그렇게 가사와 기타 프레이즈, 비에게 중심을 실어낸 믹싱이 적절히 맞아 떨어지며 그 슬픈 내용들이 플랫한 리듬 사이로 일어나며 듣는 이의 감정의 실 끝을 건드려낸다. 그리고 “제대로 살고 싶어… 제대로 살고 싶어…”라고 말끝을 흐려내는 마지막 부분은 쓴 커피의 마지막 앙금처럼 그렇게 남아 입 속을 까실하게 만든다.
컴백 무대에서 같이 선보인 곡 ‘내가 유명해지니 좋니’는 느린 박자의 곡이지만 리듬을 장황하게 몰아붙이며 유명해졌다고 다시 자신 앞에 선 여자를 향해 한 방 날려주고 싶은 주먹 끝이 흔들리는 그 순간을 오디오 스피커 앞에서 재연해낸다. 이 곡 역시 가사가 만들어 내고 있는 연출을 충실하게 소화해내는 비의 목소리가 포인트이며 비는 마치 연기 하듯 분노를 오버하지도 않고 딱 적당히 음악에 실어 내고 있다.
앨범의 주요 곡들은 마치 드라마 스토리를 만들어 내듯 이야기와 1인칭 전지적 시점(소설가 귀여니님이 최초로 시도했다는!)을 섞어가며 곡을 입체적으로 연출하고 있으며 비 역시 주인공이 되어 그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내고 있다. 물론 노래라는 게 다 가사가 있고 이런 저런 내용들을 엮어 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많은 곡들이 노래의 뼈대에 스토리가 쌓아 올려지는 데 반해 비의 곡들은 스토리에 많은 비중이 스며 들어 있고 그것을 뼈대로 곡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 스토리가 아무리 멋져도 노래와 편곡 스케이프가 가사와 따로 놀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이 없을 텐데 JYP의 곡들은 그 갭이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서 퀄리티를 인정할 만 하다.
그리고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 될 곡 하나는 ‘난 또 니가 좋은거야’ 이다. 아주 말랑말랑하게 귓가에 넘어오는 비의 목소리와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새로운 여가수 한나(‘Family affair’가 깔리던 스카이 핸드폰 선전에서 박준석의 “같이 들을래?”라는 말을 건네 받는 그 소녀)가 뇌쇄적인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들려주는 이 곡은 조금쯤 느끼할 수 있어도 보드랍게 곡의 완급을 조절한다. 플룻 타입의 신서사이저가 곱디 고운 멜로디를 꼼지락 대며 행복한 기분을 연출해 내는 이 곡은 어반 소울의 미국적인 트렌드를 따라가는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곡이다. 그리고 굳이 장르적 결과 해석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 곡이 주는 나른함과 햇살 쏟아지는 기분은 듣는 이를 가볍게 들뜨게 한다.
운이 좋아서 시작된 것이든, 그동안 칼을 갈며 꾸준한 준비 끝에 시작된 것이든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를 통해 모든 위기를 한 방의 카운터 펀치로 역전 시켜 놓은 비는 가수로 컴백해서도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기대 이상으로 선보이고 있다. 단순히 탤런트로 인기의 불씨를 되살리고 적당히 가수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수로 돌아와서도 그 이상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가 강해진 면이라면 무대 위에서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만든 안무를 통해, 그 안무를 꺼내 보이는 무대 위에서, 그리고 그가 부르는 노래를 통해 스토리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라이브로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지금 새로운 형식의 눈요기와 들을 꺼리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로 성공한 자, 무대 위에서 또 하나의 드라마를 펼쳐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지훈에서 비로, 그리고 비에서 상두로, 그리고 상두에서 업그레이드 된 비로 몇 번씩이나 도약하고 있는 그의 땀과 노력, 눈물을 한번의 무대에서 쏟아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박수를 안칠래야 안칠 수 없게끔 만든다.
일 년에도 수 십 명의 신인 가수들이 등장하고 또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는 가요계에서 우리집 오디오나 텔레비전, 컴퓨터에 시디나 MP3 파일을 상륙 시킨 가수들은 정말 엄청난 피와 땀을 흘려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수 많은 가수 중 현재 비는 군계일학이다.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개인 취향이고 각자의 몫에 불과하다는 거 알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가수 중 최고 자리에 비가 서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글 : 정병기 (inmyzen@netian.net) for celeb.
old/old_scrapbook 2003. 11. 1. 04:18
보통 선입견, 혹은 편견이란 것은 나쁜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느정도는 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직접 겪지 않고 무엇을 판단한다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런 판단을 하기까지는 그전에 지금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제비족은 여자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보기 드물고, 가수가 연기에 도전하면 대부분 초반 시청률만 올려놓고 어설픈 연기로 드라마를 망치기 마련이다. 또 삼각관계나 불치병이 나오는 드라마는 작품을 보지 않고 대충 스토리만 듣고 내용을 판단해도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은 때론 시간을 절약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굳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대충은 맞는 기준을 제시해주니 말이다.
상두를 만나보셨나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반드시 그 편견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직접 겪어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진심’조차 모르고 지나가게 되며, 그만큼 사람에 대한 믿음과 감동을 회복하기 힘들게 된다. 조금만 더 수고해서 확인하고 느꼈으면 될텐데, 사람들은 그게 귀찮아서, 혹은 이전까지의 그 뻔했던 결과들에 지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도 놓쳐버리게 된다.
KBS ‘상두야 학교가자’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드라마처럼 겉모습이 뻔해보이는 드라마도 별로 없다. 가수인(혹은 가수출신인) 비와 빈이 출연하고, 제비족이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첫사랑에게 접근한다는 내용은 흔한 학원 청춘물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상두(비)-은환-민석(이동건)의 삼각관계와 팔란(홍수현)과 심란(정애리)이 알고보면 친모녀관계였다는 것 역시 설정만으로는 지극히 진부해보인다. 또 세라는 상두의 딸(사실 친딸은 아니다)인 보리(송민주)의 엄마이고, 심란은 은환의 친어머니 못지 않은 새어머니라는 ‘꼬고 또 꼬는’ 설정까지 더해진다. 만약 ‘상두야 학교가자’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은채 대강의 이야기만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작품을 인기있는 가수 캐스팅해서 적당히 시청률만 얻으려는 그저 그런 작품쯤으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편견을 조금만 참고서 ‘상두야 학교가자’를 직접 ‘겪어’본다면, 이 작품에는 편견을 넘어서는 ‘진심’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상두야 학교가자’에 가수 비는 없다. 다만 ‘상두’를 열심히 연기하는 한 연기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운명처럼 지워진 설정 때문에 계속 괴로워하는 배우들도 없다. 다만 자신의 환경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상두야 학교가자’는 숱한 진부하고 비극적인 설정에 사람들을 놓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도록 하는 대신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채워넣고, 그 설정들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을 보여줌으로서 설정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동을 선사한다.
그 남자가 웃는 이유
겉으로 보기에 상두는 누구라도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제비족이고, 딸까지 있으며, 허풍만 센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에게 은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실’이었다는 식의 고백을 시킴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핑계로 상두의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상두야 학교가자’는 상두라는 ‘사람’의 면면을 충실히 보여주면서 그가 민석의 말대로 제비족에 애까지 딸린 인간 쓰레기라는 몇마디 말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분명히 제비족이고, 사회적인 기준으로 볼때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딸을 위해 헌신적이고, 보리의 엄마라는 이유로 세라의 일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은환에게 다시 접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오직 은환의 눈에 띄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민석이 반 협박에 가깝게 은환과 헤어질 것을 얘기해도 꿋꿋하게, 정말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은환에게 집중한다.
그에게 있어 은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수입원을 포기하고, 잠을 쪼개 온갖 일을 해야하며, 더 나아가서는 접근하지 않았다면 은환에게 멋진 남자로, 혹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자신의 모습을 모두 포기하고 그녀에게 ‘인간 쓰레기’로 남을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 사랑을 위해 일도 자존심도 모두 내팽겨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현실은 그가 은환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한다. 모든 것을 갖춘 민석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때 말하면 그만이지만, 상두는 은환 앞에서 한번 웃기위해, 혹은 은환에게 한번 잘보이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야한다. 수학 문제 하나를 풀기위해 자신의 라이벌에게 자존심 다 포기하고 읍소까지 하면서도 정작 은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은 이정도는 늘 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상두는 왜 남자가 안보이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여자 앞에서는 조금 무심한 듯, 그런건 다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듯 웃을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애인앞에서, 혹은 사람들 앞에서 어느 하나 내세울 것 하나없는 사람의 슬픔을, ‘상두야 학교가자’는 말로 항변하기보다는 하나씩 차근히 보여줌으로서 설정이 아닌 사람에게 조금씩 빠져들도록 한다.
이는 은환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설정만으로보면 은환은 첫사랑의 환상에 빠져 곁에 있는 지금의 좋은 남자를 포기하는 여자이다. 그러나, ‘상두야 학교가자’는 은환이 상두를 사랑하는 ‘감정’을 보여주는 대신 그들사이에 있었던 ‘일상’을 보여줌으로서 은환이 상두에 대해 얼마나 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상두가 현재에서 은환을 위해 죽도록 노력하듯, 은환은 상두를 만나면 만날수록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은환의 기억속에서 상두는 처음에는 어렸을적부터 알고지낸, 돈많고 여자들에게 인기많은 아이였을뿐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언제나 은환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남자였음이 드러난다. 지금의 상두가 그러하듯 은환은 상두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고, 그런 은환의 관계를 통해 이들의 사랑은 단지 ‘잊지못할 첫사랑’이라는 ‘설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두’와 ‘은환’만의 특별한, 일상이 녹아있는 사랑이 된다. 물론 민석도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은환에게 상두만큼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환에게 있어 민석의 사랑이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면 상두의 사랑은 ‘경험’이고, 그것은 민석이 애초에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었다. ‘상두야 학교가자’는 설정에 생명력을 덧붙이는 것이 그 설정속을 ‘열심히’ 살아가는 캐릭터의 평범한 일상임을 잘 알고 있다. 일상이 하나씩 쌓일수록 상두는 뻔한 제비족에서 ‘상두’가 되고, 은환의 사랑은 첫사랑에 관한 환상이 아니라 한 여성의 ‘평생’을 지배하는 사랑이 된다.
긍정의 에너지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가면 갈수록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상두야 학교가자”라는 은환의 외침으로 시작되는 드라마의 오프닝은 제비족의 학교 진출이라는 ‘설정’과 맞물려 가벼운 느낌을 주지만, ‘상두’가 ‘학교’에 ‘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상두의 일상을 통해 하나씩 쌓여가면서 그것은 보면 볼수록 웃을수만은 없는 것이 된다. 처음 상두가 학교를 간다는 사실만이 제시되었을때 그것은 제비족의 가벼운 행동이자 소동의 원인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뒤에 깔린 상두의 일상은 상두가 학교에 가서 은환을 보기까지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은 다시 은환의 과거와 맞물려 은환이 상두에게 학교에 함께가자고 했던 것 역시 얼마나 절절한 감정을 속에 숨긴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러면서 ‘상두야 학교가자’의 오프닝은 겉으로는 밝고 희망차 보이지만 속으로는 우울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것이야말로 ‘상두야 학교가자’만의 독특한 힘이다. '상두야 학교가자‘의 등장인물들은 민석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각박한 현실과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괴로워하는 대신 오히려 놀라울만큼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살아간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절대로 포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제비족에 언제 죽을지 모를 딸까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어 지낼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안되면 양파도 까고, 구슬이라도 꿰면서라도 현실을 뚫고 지나가려고 하는 것이 ’상두야 학교가자‘속 사람들의 태도이다. 아무리 주어진 현실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삶을 위해 끊임없이 웃는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그만큼 이 드라마를 동화적이라 할만큼 순수하게 만들고, 그것이 드라마에 따뜻한 느낌을 불어넣는다. 이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너무 잘 알기에, 매일 처해있는 현실에 울상짓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를 밝게 살아가는 것이 보다 나은 것임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어느새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까지 전염시켜 모두를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 빠지게 만든다. 상두가 학교 운동장 주변에 앉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앉아 상두의 일을 돕기 시작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준다. 상두가 속없을 정도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그 자체는 가볍고 밝아보인다. 그러나 상두가 그것을 하는 배경에는 은환에게 떳떳하게 다가서기 위해, 그러면서도 보리를 살리기위한 상두의 절실함이 깔려있고, 힘들지만 그 절실함을 자신의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상두의 긍정적인 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흡수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 개인의 대책없는 행동쯤으로 보이던 상두의 긍정적인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까지 전염시키면서 모두를 조금씩 좀더 착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괜찮은 상황에 놓여있는 민석이 의외로 가장 겉으로 고민을 많이 드러내는 캐릭터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는 마치 관찰자처럼 주변 사람들의 대부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 드러내지도 않고, 상두에게나 은환에게도 일단 웃기보다는 심각한 자세로 이야기한다. 한명은 최악의 상황에서 웃을 수 있고, 다른 한명은 ‘현실’의 ‘문제’부터 생각한다. 민석이 모든 것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상두에게 ‘안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단지 철없고 밝기만한 남자와 생각 깊지만 너무 진지한 남자의 대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얘들을 울릴 수 있지?
하지만 이 긍정의 에너지는 이 드라마에 따뜻하고 밝은 힘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드라마를 그 어떤 신파조의 드라마보다 더 비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이 아무리 밝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간다해도 그들을 둘러싼 현실은 정말 강철처럼 견고해서 쉽사리 깨지지 않고, 그들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현실과 부딪치는 순간, 이것은 그 상황에 좌절하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것보다 훨씬 슬프게 다가온다.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웃으며 살아보려고 했는데 현실은 그 의지를 좌절시킨다. 그들이 그 현실의 벽에 직면하면서 이들은 여전히 겉으로는 웃으려 하지만 결국 울 수 밖에 없게 되고, 그것은 드라마가 방영될수록 이들의 삶에 전염된 시청자들까지 울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심란이 팔란이 자신의 딸이었음을 알고 세라에게 울면서 마음을 고백할 때, 그것이 슬퍼지는 이유는 이들이 계속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내쏟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열심히, 그리고 밝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두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면서 살아가던 심란이 자신의 유일한 ‘죄’이던 딸을 다시 만날 때, 그리고 그저 상두하고 결혼해서 보리와 함께 행복하게만 살면 될것같았던 팔란이 심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에 그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대비되어 더 큰 눈물을 일으킨다. 누구도 울고 싶어서 울지는 않는다. 그저 살다보니, 자신의 그늘을 잊고 열심히 살다보니 어두운 현실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순간 슬픔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그것은 시청자들이 이들을 보는 태도에도 그대로 이입된다. 그토록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부딪치는 것을 그대로 봐야할 때, 그리고 거기엔 희망조차 별로 없음을 알게 될 때 시청자들은 실컷 웃다가 갑자기 우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저 설정에 머무를 수도 있었던 등장인물들 각각의 상황은 정말로 등장인물과 시청자를 ‘괴롭히는’ 진짜 현실이 된다. 현실의 무게는 현실을 자꾸 비참하게만 보여주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속의 사람을 보여줄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상두야 학교가자’는 동화적이면서도 성숙하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학교를 배경으로 상두가 은환을 위해 하는 행동들이나 희서(빈)를 구하기 위해 갑자기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상두의 행동같은 것은 때론 유치해보일 정도이지만 그런 요소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각 인물들의 긍정적인 일상과 맞물리면서 유치하다기보다는 순수한 느낌을 내고, 시청자로 하여금 오히려 이들이 계속 그런 상태로만 살기를 바라도록 만든다. 그들은 언제나 웃지만, 그 웃음을 위해 그들은 언제나 힘겹게 현실을 이겨나간다. 밝은 웃음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 한방울, 그것이 ‘상두야 학교가자’의 정서이다.
비, 감동의 비를 선사하다
그리고 이런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의 핵심에는 비의 놀라운 연기력이 자리잡고 있다. 가수로서도 ‘나쁜남자’의 진지한 모습과 각종 CF에서의 천진한 눈 웃음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그는 ‘상두야 학교가자’에서 그 모습을 더욱 확장해서 보여줌으로서 이 드라마를 자신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그의 표정은 곧 드라마의 분위기이다. 그가 대책없이 웃고 떠들때는 드라마도 함께 즐거워지지만, 그가 어느순간 현실과 맞딱뜨리게 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게 되면 드라마도, 시청자도 모두 심각해지고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게 된다. 그 밝은 미소에서 눈물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현실은 무엇인가. 비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모습을 적절히 섞으면서 현실적인 톤을 맞추기보다는 양쪽의 모습을 모두 제대로 보여줌으로서 비현실과 현실, 웃음과 눈물이 맞부딪치는 이 드라마를 지배하고 있다. 차승원의 ‘보디가드’가 그랬듯, ‘상두야 학교가자’는 남자 주연배우 한명의 캐릭터의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자리잡을 것이다. 다른 배우들도 매우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드라마에 이해할 수 없을만큼의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비의 힘에 의해서이다.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쉬운
그러나, 이런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상두야 학교가자’는 ‘걸작’이 되기에는 조금 부족한 작품이고, 그래서 볼때 더욱 묘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활력이나 독특한 감수성은 대단한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 감정을 만들기위해 너무 거친 방법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있다. 아무리 등장인물들이 아이같은 순수함을 가졌다지만 그런 상두의 순수함을 보여주기위한 사건들까지 아이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 드라마의 반쪽인 무거운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지환이 상두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상두를 바다에 빠지게 만든다든가, 혹은 조폭들과 싸우게 만드는 것은 지환의 평소 캐릭터를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너무 가볍고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물론 상두에게 시련을 주면서 상두와 은환을 더욱 가까워지게 하기 위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들은 이런 방법말고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문제만으로도 가까워질수도 있고, 갈등을 일으킬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상두는 계속 은환에게 제비족에 딸이 있다는 것을 속이는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들은 둘의 사이에 있어 어떤 사건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보다는 상두의 삶의 배경정도로만 작용하고, 실질적인 사건은 지환의 계략(?)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점은 아쉽다. 작품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상당히 독특한데 그걸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전형적인 부분들이 많아서 군데군데 드라마의 전체적인 톤과 맞지 않으면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부분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점과 맞물려 민석의 캐릭터가 좀더 살아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민석은 지금도 매력적인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는 너무나 이성적인데다가 은환에게 잘해주려는 나머지 상두나 은환에 비해 ‘인간미’가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을 줄때가 있다. 물론 그가 은환에게 상두의 또다른 모습을 고자질하거나, 무슨 못된짓을 꾸미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도 좀 인간답게 좀더 제대로 질투도 해보고, 상두까지는 아니어도 이 드라마의 다른 사람처럼 조금은 유치한척 자기 감정을 고백할 필요도 있지 않았나 싶다. 상두에 비해 훨씬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많이 생각하는 은환도 상두와 다시 사랑하기 위해 ‘10일만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을 보고 따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다른 드라마라면 이것은 유치한 행동이 됐겠지만, 드라마 전체를 통해서 그 유치한 행동이 있기까지의 사건들과 감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그런 행동들은 어느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든 밝게 뚫고 나가려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민석도 이런 모습을 좀더 제대로 보여줬으면 드라마가 보다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을 듯 싶다.
또한 이 드라마가 가끔씩 지나칠정도로 자신의 장점을 남용하고 있다는 점역시 아쉽다. 이 드라마는 천진난만함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과 그 사람들을 둘러싼 현실의 충돌이 빚어내는 독특한 감정이 강점이 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때론 그것을 지나칠정도로 강조해 한계 범위를 벗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상두가 은환의 개 짱가가 죽은 사실을 듣고 있는 민석 옆에서 계속 장난을 치는 것은 이 드라마의 흐름에서 놓고 보면 어울리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오래되어 상두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속없는’ 느낌을 준다거나, 혹은 팔란과 심란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울음바다를 만드는 장면등은 조금만 더 절제를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다. 이미 충분히 슬프고, 드라마 자체도 그렇게 드러내놓고 사람을 울리는 드라마가 아님에도 가끔씩 몇몇 장면이 그 정서를 너무 설명하려 하는 것 같아 아쉽다.
이런 거친 느낌은 연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극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은환의 과거 회상 장면들이 너무 거칠게 끼어들어가서 드라마가 조금 산만하게 진행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보다 밀접하게 돌아갔으면 좋을 것을, 은환의 과거씬은 지나치게 은환의 시점에서 사건이 설명됨으로서 드라마의 전체적인 느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처음에는 상두의 캐릭터와 몇몇 설정들을 만들어내느라 가볍게 시작됐던 드라마가 후반으로 갈수록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드라마의 독특한 분위기에 적응되기 힘들것이라는 것도 아쉽다.
물론 이는 드라마의 특징상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가뜩이나 MBC ‘대장금’과 SBS ‘왕의 여자’ 사이에서 고전할 수 밖에 없는 이 드라마가 더욱 고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될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상두야 학교가자’는 볼수록 아쉬움이 더하는 드라마이다. 물론 이 드라마를 올해 가장 ‘잘만든’ 드라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두야 학교가자’는 올해 가장 ‘따뜻한’ 드라마중 하나라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며, 더불어 종영이 얼마 안남은 지금 지금부터 보는 이 드라마의 가치를 알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도 이젠 케이블의 재방송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매력을 전달할 수 있을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편견을 버리고 한번 첫회부터 천천히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신은 어느덧 상두의 표정 하나에 웃다가 우는 자신을 보며 신기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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