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leCrown] Harry Potter : The movie - 해리포터 : 아즈카반의 죄수 (리뷰) |
영화로서 ‘해리포터 : 아즈카반의 죄수’(이하 ‘아즈카반의 죄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작품이 영화 ‘해리포터’시리즈중 처음으로 원작을 ‘성장물’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가 성장물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지만,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한 ‘해리포터’ 시리즈는 ‘아동물’내지 ‘가족영화’였지 성장영화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그가 충실했던 것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스토리속의 사건들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었지 캐릭터의 심리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퀴디치게임에서 님부스 2000을 타고 다니는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에 관심이 있었지 처음으로 단체 생활을 하면서 기쁨과 갈등, 내적 고민의 해결을 경험하는 해리포터의 모습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 콜럼버스가 연출한 두편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원작에 충실하다기보다는 원작의 ‘일부’를 요약한 것에 가까웠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는 마법사 세계의 화려한 마법들도 있는 성장물이자 미스터리 소설이었지 오직 그것만을 보여주는 소설은 아니었으니까. 크리스 콜럼버스는 영화로서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안정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는 무난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크리스 콜럼버스의 스타일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좀처럼 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해리포터 : 비밀의 방’(이하 ‘비밀의 방’)에서 드러난 것이었지만,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편을 거듭할수록 미스테리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많은 복선을 깔아두었고, 비슷한 분량이라 할지라도 ‘해리포터 : 마법사의 돌’(이하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 ‘아즈카반의 죄수’는 영화화시켰을때 그 분량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미스테리적인 요소는 늘어났고, 그만큼 뒤에 가서 설명해야할 것들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아즈카반의 죄수’는 소설에서도 전환점이 됐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J.K 롤링은 처음부터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이 저지른 죄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수많은 미스테리의 복선을 깔아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소설속에 등장한 거의 모든 것에 ‘이유’를 제시했다.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에서 미스테리가 모든 스토리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다면,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것이 거의 모든 것에 가까웠으며, ‘해리포터’시리즈는 이때부터 보다 집중적으로 해리포터를 둘러싼 '비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는 제시된 미스테리를 푸는데만 전체의 1/3정도의 분량을 할당하는 작품이 되었다. 만약 크리스 콜럼버스가 기존의 스타일대로 ’아즈카반의 죄수‘를 만들었다면 그는 정말 스토리의 요약본만 보여주다가 영화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세 번의 퀴디치 경기가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도 놓칠 수 없고,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을 최대한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을 포기할수도 없었을테니까. 만약 ’아즈카반의 죄수‘가 그런 형식으로만 마무리되었다면, 영화 ’해리포터‘는 그 자체로 늘 똑같고, 늘 뻔한 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못된 장난을 치는 감독
그래서 워너 브라더스가 크리스 콜럼버스대신 알폰소 쿠아론에게 ‘아즈카반의 죄수’를 맡긴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연출작들이 증명해주듯 그는 성장물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작의 스토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즈카반의 죄수’ 이전까지 헐리웃 주류영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심지어 영화 제작 초반에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사양인 컴퓨터 그래픽을 디멘터만큼이나 싫어했다는 이 감독은 시리즈를 안정되게 이끌어가는데 주력했던 크리스 콜럼버스와 달리 ‘해리포터’라는 히트작에 ‘못된 장난’을 쳤다. 그는 ‘아즈카반의 죄수’의 중심축인 미스테리와 복선을 거의 모두 제거한뒤, 오히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한편으로 물러난듯한 성장물의 느낌을 소설 이상으로 살려내는데 주력했다.
이는 알폰소 쿠아론의 취향탓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 그리고 원작과 영화의 관계를 현명하게 바라보고 판단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해리포터’는 이미 결말이 다 밝혀진 소설이고, 영화에서 아무리 복잡하게 그 스토리를 다 풀어낸다해도 결국 원작의 재구성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필요한 것은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 콜럼버스는 그것을 스토리를 최대한 요약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볼거리를 ‘골라내는’ 방법을 택했다면, 알폰소 쿠아론은 스토리를 ‘개조’에 가깝게 축약하고, 대신 자신의 관점을 통한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로 ‘아즈카반의 죄수’를 만들었다.
호그와트에서 생긴 일
그래서 알폰소 쿠아론은 원작에 있던 거의 모든 복선과 단서들을 ‘날려’ 버렸다. 시리우스 블랙과 자신들의 부모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나, 혹은 시리우스 블랙이 어떻게 스캐버스 / 피터 페티그루(티모시 스폴)를 어떻게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작들에서는 그토록 흥미진진한 볼꺼리였던 퀴디치 경기역시 이번에는 그 숫자도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스토리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축소되었으며, 해리포터의 승리대신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표현되었다. 소설 ‘아즈카반의 죄수’가 피터 페티그루와 시리우스 블랙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며 ‘수수께끼는 풀렸어!’를 외친다면, 영화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 과정을 마치 뮤지컬처럼 리드미컬하게, 혹은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한차례 소동으로 처리하면서 결말만을 잽싸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대신 ‘아즈카반의 죄수’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배워나가는 해리포터의 내면과, 그를 그렇게 만드는 호그와트 학교를 중심으로한 독특한 이미지들이 풍겨내는 분위기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조금씩 드러났던 해리포터의 사춘기를 보다 전면에 내세웠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고 나가기보다는 이미지로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모든 공간이 동화와같은 분위기로 채색되었던 전작들과 달리,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의 배경을 보다 실제 영국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어두운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밝고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혼재하는 이미지들을 쉴새없이 만들어낸다. ‘아즈카반의 죄수’의 호그와트는 그저 예쁘게 만들어진 동화적인 학교가 아니다. 거기에는 영국의 어느 학교보다도 더 넓을 것 같은 초원과 호수가 있으며, 그것들은 호그와트를 동화속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못된 장난’이라도 치지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아이들이 있는 현실적인 기숙사로 만든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보다 음습한 느낌으로 통일되었고, 호그와트를 포함한 배경들은 실제 영국처럼 보다 축축하고 서민적인 느낌이 베어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의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공간은 신기한 마법이 가득한 호그와트 기숙사 안보다는 해리포터와 그의 친구들에게 들어있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더욱 적극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학교 밖의 자연경관들, 즉 그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혹은 학생-교수와의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우정 비슷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호그와트 기숙사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청소년이 겪는 학창시절의 기록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교실에서 진행되는 지루한 수업들이 아니라 교실 바깥, 혹은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숱한 ‘못된 장난’들이니까.
조금더 삐딱하게, 조금더 불손하게
이런 현실적인 바탕안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쉴새없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해리포터, 혹은 사춘기의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그려낸다.
어둡고 축축한 호그와트의 배경속에서, 해리포터와 관객들은 순간순간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해리포터가 겪는 사춘기의 감정들이다. 마법사 구조버스에서 몸을 싣고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하는 해리포터의 앞에서 차장의 얼굴위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기괴한 이미지나 그와 동료들이 살고 있는 호그와트 기숙사 내부의 황금빛 조명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느낌, 그가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어두운 하늘속에서 흐느적거리며 날아오르는 수십마리의 디멘터가 만들어내는 말세적인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면, 그것은 해리포터가 학교생활 도중 순간순간 느끼는 불안과 공포, 분노와 해방으로 이어진다. 볼드모트와도 용감하게 맞섰던 그는 디멘터로 인해 처음으로 진정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끼고, 원작속에서는 벅빅을 다룰줄아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위해 등장시킨 벅빅과의 만남이 영화속에서는 해리포터가 하늘을 나는 쾌감속에서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스네이프 교수에게 비밀 지도를 들켰을때 원작에서는 확실히 그들의 선배가 걸어놓은 마법대로 읽혀진 종이를 그대로 읽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는 그것을 마치 해리포터가 대드는 것처럼 보여준다. 원작과 달리 해리포터는 ‘조금더’ 불손하고, ‘조금더’ 제멋대로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런 사춘기의 정서를 호그와트라는 공간속의 시간의 흐름과 해리포터와 호그와트 인물들이 빚어내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 특유의 분위기로 통합해낸다. 즉, 해리포터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해리포터 개인의 모험이라기보다는 호그와트 학교안에서 1년동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차분한 기록이고, 동시에 해리포터가 실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었던 이모부의 집에서 벗어나 호그와트안에서 친구와 형, 혹은 자신의 새로운 보호자를 찾는 과정이다. 호그와트의 나무들에서 나뭇잎이 자라고, 낙엽이 되었다가 다시 새순이 돋는동안, 해리포터는 1년여의 학교 생활을 통째로 겪게 된다. 즉, 전작들이 중점적으로 보여줬던 것이 해리포터가 겪는 사건들이었던데 반해,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 사건들마저도 호그와트 생활중 일부로 보여주고, 그만큼 중심 스토리 이외의 것들에서 드러나는 사춘기 소년 해리포터의 생활을 보여준다. 원작에는 없었던, 해리포터와 론, 그리고 그 밖의 친구들이 기숙사 침대 위에서 함께 모여 동물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사탕을 먹고 장난치는 모습들이나 답답한 재킷을 벗어던지고 살짝 푼 넥타이를 맨채 보다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학생들의 모습, 바로 그런 것들이 호그와트의, 혹은 기숙사학교에서 사는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해리포터가 디멘터를 물리치려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해리포터의 일상의 일부이고,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호그와트의 학생, 즉 사춘기를 겪는 학생의 감성을 가진 해리포터의 감정을 통해 해석된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포터와 루핀(데이비드 더울리스)교수의 독특한 관계는 원작의 스토리라인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원작에서 루핀은 해리포터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해리포터에게 디멘터를 물리치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같은 선생님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영화에서의 루핀은 해리포터의 선생님이자 친구이며 형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다른 많은 스토리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리포터와 루핀의 관계는 거의 그대로 남아 이들의 관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까닭도 있지만, 알폰소 쿠아론이 영상을 통해 이들사이에 흐르는 사제지간 이상의 어떤 감정을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이서 사적으로 만나 디멘터의 퇴치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기숙사 바깥인 탁 트인 야외의 다리 위에서 오직 둘만이 남아 해리포터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해리포터와 루핀의 관계를 단순한 사제지간이상의, 사적으로 보다 친밀한 느낌을 부여하고, 이것은 사춘기의 학생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형같은 선생님’의 모델이 된다. 덤블도어같은 교장은 존경스럽긴하지만 너무나 근엄하고, 스네이프(알란 릭맨)는 공사가 철저하긴 하지만 친하게 지낼수는 없다. 그러나 루핀은 보다 친근하고,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보호자같지않은 보호자를 거부한 해리포터는 루핀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이는 시리우스 블랙과의 만남을 통해 해리포터에게 정신적인 보호자가 생기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소설에서 시리우스 블랙이 해리포터가 지긋지긋한 이모부를 떠나 호그스미드에 방문할 수 있는 허가서를 써줄 수 있는 새로운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면, 영화속의 시리우스 블랙은 그런 보호자의 느낌대신 해리포터가 맞이하는 새로운 ‘가족’의 느낌에 가깝다. 해리포터도 드디어 같이 살만한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해리포터에게 필요한 것
물론 이런식의 접근방식이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스토리의 복선들을 너무나 삭제한 나머지 영화의 엔딩에서마저도 긴장감이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해진 엔딩을 어쩔수없이 허겁지겁 처리한다는 느낌까지 드는 영화의 전개나, 스토리의 흐름보다는 인상적인 이미지중심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전개는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받아들이는대로 영화를 느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지만 대신 산만하게 느껴질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알폰소 쿠아론이 원작을 자신의 관점대로 해석한다해도 그것이 ‘해리포터’라는 원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멘’과같은 작품들은 이미 수십년동안 발표된 원작들이 있기에 오히려 감독들이 자기 나름대로 원작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최신 히트작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는 ‘해리포터’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감독이라 하더라도 원작을 마음대로 바꿔놓을수는 없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는 원작의 중심 스토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기보다는 스토리의 흐름을 따르면서 앞서 언급한 이미지들이나 원작에는 없던 씬들을 끼워넣으면서 사춘기의 해리포터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슬쩍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벅빅을 타고 환호하거나, 디멘터에 두려움을 느끼는 해리포터의 모습들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지만, 그것이 영화 전체적으로 사춘기의 청소년이 겪는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다니는 사춘기의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즈카반의 죄수’ 전체가 사춘기에 대해 파고드는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즈카반의 죄수’는 두들리 가족에 대한 해리포터의 분노를 보여줌으로서 사춘기의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스토리속으로 파고들어가서 가족이 없는 해리포터의 상실감과 방황까지 건드리지는 못한다. 지난 겨울까지 ‘반지의 제왕’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원작 이식률’을 보이며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올 여름 ‘스파이더맨 2’가 누구나 뻔하게만 생각했던 영웅물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영웅물의 새로운 길을 연 상황에서 ‘해리포터’의 이 소박한 변화는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해리포터’시리즈중 가장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최근의 몇몇 블록버스터가 보여준 발전에는 못미친다.
그러나, ‘아즈카반의 죄수’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드디어 소설과 분리되어 평가할 수 있는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안전하게 이끌어가던 동화같은 마법의 세계를, 알폰소 쿠아론은 세계적인 히트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하는 ‘영화화’의 과정에 보다 충실하면서 ‘해리포터’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소설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한다면, 영화는 거칠게 이어지는 스토리와 환상적인 이미지들의 충돌, 그리고 그만큼이나 정신없는 사춘기의 에너지를 담아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소설과 조금이나마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스네이프 교수의 캐릭터가 소설과 차이를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의 세세한 복선을 모두 제거해버려 그대로 ‘보면’ 되는 영화로 탄생했다. 아마 좋든 싫든 알폰소 쿠아론, 혹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맡을 또다른 감독들은 이제 이 시리즈를 ‘영화’로 생각하고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제 ‘해리포터’는 소설을 ‘옮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가 될 것이다. 특히 다음 작품이 실제 분량마저 두배로 늘어난, 그래서 ‘자신만의 영화’로 ‘해리포터’를 해석하지 않으면 영화화 자체가 힘들수도 있는 ‘해리포터 : 불의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못된 장난’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그러나 크리스 콜럼버스의 스타일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좀처럼 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해리포터 : 비밀의 방’(이하 ‘비밀의 방’)에서 드러난 것이었지만,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편을 거듭할수록 미스테리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많은 복선을 깔아두었고, 비슷한 분량이라 할지라도 ‘해리포터 : 마법사의 돌’(이하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 ‘아즈카반의 죄수’는 영화화시켰을때 그 분량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미스테리적인 요소는 늘어났고, 그만큼 뒤에 가서 설명해야할 것들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아즈카반의 죄수’는 소설에서도 전환점이 됐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J.K 롤링은 처음부터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이 저지른 죄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수많은 미스테리의 복선을 깔아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소설속에 등장한 거의 모든 것에 ‘이유’를 제시했다.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에서 미스테리가 모든 스토리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다면,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것이 거의 모든 것에 가까웠으며, ‘해리포터’시리즈는 이때부터 보다 집중적으로 해리포터를 둘러싼 '비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는 제시된 미스테리를 푸는데만 전체의 1/3정도의 분량을 할당하는 작품이 되었다. 만약 크리스 콜럼버스가 기존의 스타일대로 ’아즈카반의 죄수‘를 만들었다면 그는 정말 스토리의 요약본만 보여주다가 영화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세 번의 퀴디치 경기가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도 놓칠 수 없고,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을 최대한 차근차근 풀어나가면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을 포기할수도 없었을테니까. 만약 ’아즈카반의 죄수‘가 그런 형식으로만 마무리되었다면, 영화 ’해리포터‘는 그 자체로 늘 똑같고, 늘 뻔한 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못된 장난을 치는 감독
그래서 워너 브라더스가 크리스 콜럼버스대신 알폰소 쿠아론에게 ‘아즈카반의 죄수’를 맡긴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연출작들이 증명해주듯 그는 성장물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작의 스토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즈카반의 죄수’ 이전까지 헐리웃 주류영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심지어 영화 제작 초반에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사양인 컴퓨터 그래픽을 디멘터만큼이나 싫어했다는 이 감독은 시리즈를 안정되게 이끌어가는데 주력했던 크리스 콜럼버스와 달리 ‘해리포터’라는 히트작에 ‘못된 장난’을 쳤다. 그는 ‘아즈카반의 죄수’의 중심축인 미스테리와 복선을 거의 모두 제거한뒤, 오히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한편으로 물러난듯한 성장물의 느낌을 소설 이상으로 살려내는데 주력했다.
이는 알폰소 쿠아론의 취향탓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 그리고 원작과 영화의 관계를 현명하게 바라보고 판단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해리포터’는 이미 결말이 다 밝혀진 소설이고, 영화에서 아무리 복잡하게 그 스토리를 다 풀어낸다해도 결국 원작의 재구성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필요한 것은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 콜럼버스는 그것을 스토리를 최대한 요약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볼거리를 ‘골라내는’ 방법을 택했다면, 알폰소 쿠아론은 스토리를 ‘개조’에 가깝게 축약하고, 대신 자신의 관점을 통한 하나의 일관된 분위기로 ‘아즈카반의 죄수’를 만들었다.
호그와트에서 생긴 일
그래서 알폰소 쿠아론은 원작에 있던 거의 모든 복선과 단서들을 ‘날려’ 버렸다. 시리우스 블랙과 자신들의 부모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나, 혹은 시리우스 블랙이 어떻게 스캐버스 / 피터 페티그루(티모시 스폴)를 어떻게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작들에서는 그토록 흥미진진한 볼꺼리였던 퀴디치 경기역시 이번에는 그 숫자도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스토리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축소되었으며, 해리포터의 승리대신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표현되었다. 소설 ‘아즈카반의 죄수’가 피터 페티그루와 시리우스 블랙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며 ‘수수께끼는 풀렸어!’를 외친다면, 영화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 과정을 마치 뮤지컬처럼 리드미컬하게, 혹은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한차례 소동으로 처리하면서 결말만을 잽싸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대신 ‘아즈카반의 죄수’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배워나가는 해리포터의 내면과, 그를 그렇게 만드는 호그와트 학교를 중심으로한 독특한 이미지들이 풍겨내는 분위기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조금씩 드러났던 해리포터의 사춘기를 보다 전면에 내세웠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고 나가기보다는 이미지로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모든 공간이 동화와같은 분위기로 채색되었던 전작들과 달리,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의 배경을 보다 실제 영국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어두운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밝고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혼재하는 이미지들을 쉴새없이 만들어낸다. ‘아즈카반의 죄수’의 호그와트는 그저 예쁘게 만들어진 동화적인 학교가 아니다. 거기에는 영국의 어느 학교보다도 더 넓을 것 같은 초원과 호수가 있으며, 그것들은 호그와트를 동화속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못된 장난’이라도 치지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아이들이 있는 현실적인 기숙사로 만든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보다 음습한 느낌으로 통일되었고, 호그와트를 포함한 배경들은 실제 영국처럼 보다 축축하고 서민적인 느낌이 베어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의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공간은 신기한 마법이 가득한 호그와트 기숙사 안보다는 해리포터와 그의 친구들에게 들어있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더욱 적극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학교 밖의 자연경관들, 즉 그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혹은 학생-교수와의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우정 비슷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호그와트 기숙사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청소년이 겪는 학창시절의 기록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교실에서 진행되는 지루한 수업들이 아니라 교실 바깥, 혹은 학교 밖에서 벌어지는 숱한 ‘못된 장난’들이니까.
조금더 삐딱하게, 조금더 불손하게
이런 현실적인 바탕안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쉴새없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해리포터, 혹은 사춘기의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그려낸다.
어둡고 축축한 호그와트의 배경속에서, 해리포터와 관객들은 순간순간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해리포터가 겪는 사춘기의 감정들이다. 마법사 구조버스에서 몸을 싣고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하는 해리포터의 앞에서 차장의 얼굴위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기괴한 이미지나 그와 동료들이 살고 있는 호그와트 기숙사 내부의 황금빛 조명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느낌, 그가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어두운 하늘속에서 흐느적거리며 날아오르는 수십마리의 디멘터가 만들어내는 말세적인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면, 그것은 해리포터가 학교생활 도중 순간순간 느끼는 불안과 공포, 분노와 해방으로 이어진다. 볼드모트와도 용감하게 맞섰던 그는 디멘터로 인해 처음으로 진정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끼고, 원작속에서는 벅빅을 다룰줄아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위해 등장시킨 벅빅과의 만남이 영화속에서는 해리포터가 하늘을 나는 쾌감속에서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스네이프 교수에게 비밀 지도를 들켰을때 원작에서는 확실히 그들의 선배가 걸어놓은 마법대로 읽혀진 종이를 그대로 읽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는 그것을 마치 해리포터가 대드는 것처럼 보여준다. 원작과 달리 해리포터는 ‘조금더’ 불손하고, ‘조금더’ 제멋대로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런 사춘기의 정서를 호그와트라는 공간속의 시간의 흐름과 해리포터와 호그와트 인물들이 빚어내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 특유의 분위기로 통합해낸다. 즉, 해리포터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해리포터 개인의 모험이라기보다는 호그와트 학교안에서 1년동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차분한 기록이고, 동시에 해리포터가 실질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었던 이모부의 집에서 벗어나 호그와트안에서 친구와 형, 혹은 자신의 새로운 보호자를 찾는 과정이다. 호그와트의 나무들에서 나뭇잎이 자라고, 낙엽이 되었다가 다시 새순이 돋는동안, 해리포터는 1년여의 학교 생활을 통째로 겪게 된다. 즉, 전작들이 중점적으로 보여줬던 것이 해리포터가 겪는 사건들이었던데 반해, ‘아즈카반의 죄수’는 그 사건들마저도 호그와트 생활중 일부로 보여주고, 그만큼 중심 스토리 이외의 것들에서 드러나는 사춘기 소년 해리포터의 생활을 보여준다. 원작에는 없었던, 해리포터와 론, 그리고 그 밖의 친구들이 기숙사 침대 위에서 함께 모여 동물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사탕을 먹고 장난치는 모습들이나 답답한 재킷을 벗어던지고 살짝 푼 넥타이를 맨채 보다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학생들의 모습, 바로 그런 것들이 호그와트의, 혹은 기숙사학교에서 사는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해리포터가 디멘터를 물리치려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해리포터의 일상의 일부이고,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호그와트의 학생, 즉 사춘기를 겪는 학생의 감성을 가진 해리포터의 감정을 통해 해석된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포터와 루핀(데이비드 더울리스)교수의 독특한 관계는 원작의 스토리라인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원작에서 루핀은 해리포터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해리포터에게 디멘터를 물리치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같은 선생님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영화에서의 루핀은 해리포터의 선생님이자 친구이며 형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다른 많은 스토리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리포터와 루핀의 관계는 거의 그대로 남아 이들의 관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까닭도 있지만, 알폰소 쿠아론이 영상을 통해 이들사이에 흐르는 사제지간 이상의 어떤 감정을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이서 사적으로 만나 디멘터의 퇴치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기숙사 바깥인 탁 트인 야외의 다리 위에서 오직 둘만이 남아 해리포터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해리포터와 루핀의 관계를 단순한 사제지간이상의, 사적으로 보다 친밀한 느낌을 부여하고, 이것은 사춘기의 학생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형같은 선생님’의 모델이 된다. 덤블도어같은 교장은 존경스럽긴하지만 너무나 근엄하고, 스네이프(알란 릭맨)는 공사가 철저하긴 하지만 친하게 지낼수는 없다. 그러나 루핀은 보다 친근하고,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보호자같지않은 보호자를 거부한 해리포터는 루핀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이는 시리우스 블랙과의 만남을 통해 해리포터에게 정신적인 보호자가 생기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소설에서 시리우스 블랙이 해리포터가 지긋지긋한 이모부를 떠나 호그스미드에 방문할 수 있는 허가서를 써줄 수 있는 새로운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면, 영화속의 시리우스 블랙은 그런 보호자의 느낌대신 해리포터가 맞이하는 새로운 ‘가족’의 느낌에 가깝다. 해리포터도 드디어 같이 살만한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해리포터에게 필요한 것
물론 이런식의 접근방식이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스토리의 복선들을 너무나 삭제한 나머지 영화의 엔딩에서마저도 긴장감이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해진 엔딩을 어쩔수없이 허겁지겁 처리한다는 느낌까지 드는 영화의 전개나, 스토리의 흐름보다는 인상적인 이미지중심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전개는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받아들이는대로 영화를 느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지만 대신 산만하게 느껴질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알폰소 쿠아론이 원작을 자신의 관점대로 해석한다해도 그것이 ‘해리포터’라는 원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멘’과같은 작품들은 이미 수십년동안 발표된 원작들이 있기에 오히려 감독들이 자기 나름대로 원작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최신 히트작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는 ‘해리포터’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감독이라 하더라도 원작을 마음대로 바꿔놓을수는 없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는 원작의 중심 스토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기보다는 스토리의 흐름을 따르면서 앞서 언급한 이미지들이나 원작에는 없던 씬들을 끼워넣으면서 사춘기의 해리포터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슬쩍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벅빅을 타고 환호하거나, 디멘터에 두려움을 느끼는 해리포터의 모습들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지만, 그것이 영화 전체적으로 사춘기의 청소년이 겪는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다니는 사춘기의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즈카반의 죄수’ 전체가 사춘기에 대해 파고드는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즈카반의 죄수’는 두들리 가족에 대한 해리포터의 분노를 보여줌으로서 사춘기의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스토리속으로 파고들어가서 가족이 없는 해리포터의 상실감과 방황까지 건드리지는 못한다. 지난 겨울까지 ‘반지의 제왕’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원작 이식률’을 보이며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올 여름 ‘스파이더맨 2’가 누구나 뻔하게만 생각했던 영웅물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영웅물의 새로운 길을 연 상황에서 ‘해리포터’의 이 소박한 변화는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해리포터’시리즈중 가장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최근의 몇몇 블록버스터가 보여준 발전에는 못미친다.
그러나, ‘아즈카반의 죄수’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드디어 소설과 분리되어 평가할 수 있는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안전하게 이끌어가던 동화같은 마법의 세계를, 알폰소 쿠아론은 세계적인 히트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하는 ‘영화화’의 과정에 보다 충실하면서 ‘해리포터’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소설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려고 노력한다면, 영화는 거칠게 이어지는 스토리와 환상적인 이미지들의 충돌, 그리고 그만큼이나 정신없는 사춘기의 에너지를 담아냈다. 그래서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소설과 조금이나마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스네이프 교수의 캐릭터가 소설과 차이를 보여주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의 세세한 복선을 모두 제거해버려 그대로 ‘보면’ 되는 영화로 탄생했다. 아마 좋든 싫든 알폰소 쿠아론, 혹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맡을 또다른 감독들은 이제 이 시리즈를 ‘영화’로 생각하고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제 ‘해리포터’는 소설을 ‘옮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가 될 것이다. 특히 다음 작품이 실제 분량마저 두배로 늘어난, 그래서 ‘자신만의 영화’로 ‘해리포터’를 해석하지 않으면 영화화 자체가 힘들수도 있는 ‘해리포터 : 불의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못된 장난’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