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 몸속에 숨어 있는 악마 - 우리에게 STAR는 무엇인가 (4) 설경구 |
설경구 몸 안에는 악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악마는 매번 갑작스럽게 설경구의 피부 표면으로 튀어나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악마의 호소에 우리는 번번이 뼛속까지 공명한다.
<박하사탕>에서 그 악마는 여러 번 출몰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설경구가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누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설경구의 얼굴은 갑작스럽게 돌변한다. 그는 난데없이 연극배우의 톤으로 연기한다. 그 얼굴에는 절망적인 자조와 세상에 대한 냉소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은 감정의 분출을 넘어선 악(惡)의 표정이다. 도대체 그 악마는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나.
영화나 연극이나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거칠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과 싸워 반드시 이기는 캐릭터고,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세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근대 문학에서는 주로 후자인 패배자가 주인공이다. 근대 세계의 폭압성에 반항하고, 은폐된 전체주의와 세계의 근본적인 허구성을 폭로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파멸에 이르기 마련이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연기하는 영호는 이러한 패배자의 전형적인 예다. 이들은 자기 존재에 충실한 생을 살지만, 이는 곧 세상 밖으로 이탈하는 길이다. 이렇게 세상의 궤도 밖으로 본의 아니게 벗어난 이들에게 세상은 악의 소굴이다. 그리고 악은 악을 부른다. 설경구의 악마는 바로 이때 태어난다. 세상이라는 악의 축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태어난 악이다. <박하사탕>은 바로 그러한 악의 기원을 탐구하는 영화였고, 설경구는 그러한 역할을 맡기에 더없이 적격인 인물이었다.
설경구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물화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싸운 흔적이다. <박하사탕>에서 그는 군인으로서, 또 경찰로서 악을 저질러야 했다. 폭압적인 제도는 그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도록 종용했고, 그는 결국 본의 아니게 ‘악당’과 한 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그 구조적인 악과 싸우게 된다. 그 악이 악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야 무승부로나마 게임을 끝낼 수 있지만, 그는 끝내 싸움을 택하고 만다. 이 싸움은 지극히 본능적인 것이고, 혁명가가 아닌 이상 앞서 말했듯이 그는 반드시 여기서 패배하게 돼 있다. 계엄령을 또 다른 쿠데타로 저지하지 않는 한 계엄령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폐된 악을 감지하는 몸은 이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비극적인 몸속에 숨은 악마가, 카메라 앞에 선 설경구의 것인지, 자연인 설경구의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배회하다 술집 안으로 들어가 모조리 뒤집어엎는 악마는 배우 설경구의 것인가, 아니면 자연인 설경구의 것인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야유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악마는 또한 누구의 것인가.
그는 자연인 설경구의 몸속에 이미 숨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설경구는 그 악마를 몸속에 지닌 채 카메라 앞에 설 뿐이다. 어느 배우든 분노하는 척 연기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내면 연기가 빼어난 배우도 이러한 악마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 악마가 배우의 몸속에서 오래전부터 자라지 않으면 관객들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박하사탕>에서 하듯이 우리가 설경구 삶의 궤적을 쫓으면 영화 속에서 영호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경험을 설경구의 기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악마가 항상 설경구를 돕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나는 아주 불편하게 봤다. 설경구는 연신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하지만 악마가 거듭 방해한다.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거나, 강아지를 발로 걷어찰 때만 출현해야 할 악마가, 사랑의 순간에도 끼어드는 것이다. 설경구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악마가 갑자기 등장할까봐 관객들은 불안하다. 웃고 있는 이 소시민 은행원이 돌연 표정을 바꿔 달려들지는 않을까 관객들은 두려워진다.
흥겨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와도 설경구가 화면에 등장하면 음악의 뉘앙스는 을씨년스러워진다. 이런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고 상투적인 사랑으로 관객들을 보기 좋게 기만해야 성공하는데, 설경구의 악마는 자꾸 상대역과의 달콤한 관계에 대해 회의를 품고, 연애라는 제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려고 해서, 이 영화의 톤은 기괴해지고 관객들은 불편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녀 주인공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장면인데, 왠지 이들은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 같지 않다.
<광복절 특사>도 앞선 경우와 유사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설경구가 억지 웃음을 짓지 않는다. 그는 사랑 때문에 교도소를 탈출해 떼를 쓰는 인물로서, 여느 설경구와 유사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서 설경구는 관객들을 웃겨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설경구가 등장할 때마다 그의 주변은 곧장 싸늘해지고 영화는 비극적인 톤으로 전환된다. 설경구 역시 연기하면서도 그리 즐겁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기발한 상황으로만 관객들을 웃기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 남도 웃기지 못하는 것이다.
<공공의 적>에 이르면 이 악마의 역할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강우석은 이창동과는 달리 주인공이 ‘승리’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렇다면 설경구의 악마는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이 세상과 싸워 패하지 않으면 이 악마의 존재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석과 설경구는 이 곤란한 상황을 슬기롭게도 윈윈 게임으로 몰고가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에서도 설경구의 악마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박하사탕>에서와 같다. 설경구의 몸이 구조적이고도 근본적인 이 세계의 악을 동물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다. 감지된 악과 싸우기 위해 설경구의 몸에서 악마가 태어난다. 멜로드라마에서 숨죽이고 있던 설경구의 악마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강우석은 이 악마를 보편적인 정의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승리하게 한다. 설경구는 영화 초반에 말 그대로 ‘루저(looser)’로 묘사되지만, 결국 그는 ‘위너(winner)'가 된다. 이 영화가 훌륭한 이유는 설경구가 품은 악마의 속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그에게 승리 또한 안겨줬다는 점이다. 이것이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를 고루 얻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아시스>에서 이 악마는 이상한 방식으로 합리화된다. 악마가 숨어든 몸의 지능을 낮춤으로써 악마가 품고 있던 악의 성격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우리는 <박하사탕>에서와 같은 악마의 공격성을 찾아볼 수 없다. 몸의 지능이 낮아서 이번에는 타락하기도 어렵다. 순진한 악마는 이번에도 패배를 예상하지만, 동시에 신기루처럼 떠오른 오아시스에 도달하기를 갈망한다. 이렇게 이 영화는 필연적인 패배와 생생한 이데아를 통해 슬픈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급기야 <실미도>에서 설경구의 악마는 세상과 타협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채 거두지 못했지만, 어쨌든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세상의 악과 마찰하지 않는, 패배하지 않는, 최소한 무승부라도 거두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실미도라는 섬은 이 악마에게 갱생의 공간이다. 그 악마는 여전히 세상의 부조리를 감지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악마는 부조리에 대항해 봉기하는 무리에 끼어들고 만다. 그리고 역시 결과는 패배다. 마음을 고쳐먹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내가 설경구 안에 숨은 또 하나의 자아를 악마로 칭한 것, 그가 어쨌든 ‘악’에 받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존재의 저 밑바닥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자의 비애다. 너무 슬퍼서 지극히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이렇듯 설경구는 지극히 문학적인 인물이다. 그가 전직 소설가가 만든 영화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문학적인 테마에 걸맞은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나 <단적비연수>에서처럼 관습적인 영화의 문법으로 연기할 때 불편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설경구가 독보적인 이유는 한국 영화계에서 그처럼 문학적인 테마를 남김 없이 구현할 만한 배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며 존재의 밑바닥까지 들추어낼 수 있는 배우가 그 말고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