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 순응과 거부의 경계선에 선 영웅 - 우리에게 STAR는 무엇인가 (2) 송강호
old/old_scrapbook 2004. 8. 2. 14:37


영화가 존재한 이래 스타는 항상 영화와 함께 관객과 호흡했다. 스크린 위에 다양한 얼굴로 등장했던 그들은 배우 그 이상의 의미를 응축하고 대중에게 다가왔다. 스타는 시대를 반영하는 페르소나였으며, 시대를 거스르는 선동가였고, 관객의 무의식을 하나의 완결된 형상으로 집약하는 아이콘이었다. 대중은 스타에게서 이상을 발견하고, 삶을 안위하고, 동질의 쾌락과 이질의 판타지를 동시에 꿈꿨다. 스타의 위상과 기능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표정을 달리해 왔고, 지금 우리의 시대엔 우리들만의 스타가 있다. 장동건, 송강호, 권상우, 설경구, 전도연, 최민식, 전지현 일곱 명의 스타가 그들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대중과 만나는 접점을 차례대로 추적한다. 스타, 그들은 대중에게 무엇인가.


송강호는 정물의 피사체로 다가와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배우는 아니다. 그가 피와 살이 붙은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조금씩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틈을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다. 우헤헤헤, 라고 웃는 그의 웃음소리와 말을 거듭하다 보면 약간 하이 톤으로 올라가는 그의 음성은 배우 같지 않은 외관을 지닌 그가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는 힘을 불어넣는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얼굴, 그렇지만 다종다기한 감정이 가능한 인간의 얼굴로 바뀔 수 있는 백지 같은 장점을 끌어안고 있다. 그건 연기파 배우에게 던지는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냐고?
이 배우의 웃음과 억양은 우리의 일상 삶 속에 감춰져 있는 빈틈을 느닷없이 파고드는 시적 진실성을 갖고 있다. 그는 산문형 배우가 아니다. 그는 매우 평범하고 알맹이가 없는 대사를 그야말로 ‘말하고 있을 때’ 빛이 나는 배우다. 그에게는 장르 영화의 정형화된, 규격화된 대사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밥 먹고 티격태격하는 일상에 툭 처박혀 있다가 어느 순간 감정을 살짝 드러내 보이는 틈새의 언설로 관객에게 저항할 수 없는 친밀감을 안겨준다. 때로는 더듬거리며, 때로는 착 가라앉은 무게 잡는 목소리로, 때로는 애인 앞에서는 절대 들려주지 않을 촐랑거리는 웃음소리로 인간의 다면체적인 모습을 전시하는 것이다. 그가 출연한 일련의 성공작들과 그 후광을 입은 텔레비전의 CF에서 그는 웰빙의 매끈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그런 모델이 아니다. 선술집에서 골라 먹는 나름대로 비싼 술에 감읍하는 남자, 집에서 후룩거리며 먹는 된장찌개에 홀린 가장, 좋은 차 샀다고 뻐기다가 다소 촌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성공한 남자의 모습 등이 그가 광고에서 전시하는 것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배우인 그는 남들보다 앞선 선남의 모습으로 스타가 되지 않았다. 그건 거꾸로 그가 아직 한국영화에서 개척되지 않은 숱한 현실적 캐릭터를 소화할 준비가 돼 있는 사정과도 통한다. 그는 이 범부의 이미지에 내장한 웃음과 분노와 어수룩함을 무기로 매우 극적인 영화적 상황에 던져졌을 때 주름이 많은 감정 연기를 가능하게 만든다. <살인의 추억>의 도입부에서 제법 연조 있는 형사 행세를 하며 살인 현장의 보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다소 의기양양하게 공간을 장악하는 그런 이미지 뒤로 "박 기자 안 왔어요? 박 기자? 아유 그 XXX, 안 보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란 말을 내뱉으며 낄낄거린다. 나름대로 직업적 허세를 부리며 자긍심을 갖는 이 형사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스릴러 형식으로 시작하는 영화에 아주 일찌감치 인간적 온기를 입힌다. <반칙왕>과 에서 그는 신구 씨가 연기하는 아버지와 대면해 장남으로서 뭔가 위엄 있는 처신을 하려다가 아버지로부터 타박을 받고 화들짝 놀라며 토끼눈을 하는 급작스런 감정의 반전을 능청맞게 보여 준다. 낮은 목소리에서 높은 목소리로 느닷없이 톤을 바꿔도, 평범한 일상에서 희극적인 강조점을 찍는 난장판으로 옮겨가도, 무리가 없는 것이 송강호의 힘이다. 그건 평범하게 웅크렸다가 어느 순간 틈새를 비치며 슬쩍, 그렇지만 세게 껍질을 밀쳐내며 보여 주는 그의 인간적인 얼굴과 목소리의 힘이다.


송강호의 연기는 또한 스스로 행동할 때보다 행동하지 않는 단락에서 알아서 나꿔채는, 상대와의 조화 능력에서도 나온다. <살인의 추억>의 클라이맥스 직전 장면에서 여중생이 살해당한 것을 목격한 서 형사가 황망한 감정으로 숲을 빠져나올 때 그를 지나치는 송강호는 보일 듯 말 듯 팔을 살짝 들듯한 행동으로 서 형사를 건드리려다 만다. 이 화면에서 관객의 주의 집중점은 서 형사에게 고정돼 있지만 그를 지나치는 박두만 형사를 연기하는 송강호는 그 주의 집중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기에 강력한 정서적 온기를 입히는 행동을 그 미미한 팔 동작으로 덧칠한다. 상대의 연기를 받아주면서 되로 돌려주는 연기가 이 사소한 몸짓 하나에 달려 있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각하는 국가다’를 복창할 것을 요구하는 대통령 경호실장 앞에서 속으로 말을 삼키듯이 하며 "아, 가-각하는 국가다"라고 복창하는 그의 모습은 상대의 말을 흡수하고 동시에 튕기면서 자극하는 송강호식 연기의 조화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송강호는 대사를 발성하는 것보다는 말할 줄 아는 그의 능력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연극배우 출신인 그는 영화배우로서 실제 생활에 가깝게 말하는 특유의 음조에서 가장 가식적이지 않은 톤을 찾아낸 음성으로 감정을 전하는 데 능란하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그는 괴짜 노인을 만나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기괴한 처방을 들은 뒤 그곳을 떠나는 장면을 연기하는 와중에 아들에게 들릴 듯 말 듯 거 참, 노인네 노망이 났나, 라는 식의 중얼거림으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아버지의 황망한 감정을 드러낸다. 또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개울가 물에 유괴범 신하균을 처박고 그의 발목 동맥을 끊을 때 "내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의 무심한 일상적 톤에서 감정의 증폭을 자연스레 꾀하는 억눌린 감정을 쓸어 담는다.


송강호는 이 일상적이며 다층적인 캐릭터의 숱한 틈새에서 스스로 존재감을 내세웠을 때 가장 호소력 있는 출구를 찾아낸다. <살인의 추억>의 유명한 클로즈업 장면은 물론이고 <반칙왕>에서 가수 남진의 흉내를 내며 노래를 부를 때 그는 그 상황에 알맞은 가장 정확한 제스처를 찾아낸다. <초록물고기>의 건들거리는 양아치나 <넘버 3>의 삼류 깡패 두목을 연기하는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경계를 정하지 않았을 때 가닿을 수 있는 최적의 음조와 몸짓과 리듬을 찾아낸다. 이는 <나쁜 영화>에서 정물처럼 무덤덤하게 서 있는 송강호의 모습이나 정해진 각본의 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갑갑증을 안겼던 <쉬리>의 첩보원 역과 달리 스스로 움치면서 달아날 수 있는 그의 배우로서의 영혼이 어떤 인간형을 찾아내는 더듬이를 쉴 사이 없이 작동할 때 그가 가장 빛날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거꾸로 증명하는 것이다.


송강호는 어떤 역을 맡아도 자기화해서 송강호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그 직업, 계층, 성격의 인물에 맞는 분위기를 절대적으로 창조한다는 점에서 아주 미세한 일상적인 결에서 감성을 창조하는 예술가다. 그의 연기는 연극적이거나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틀을 굳이 겨냥하지 않으면서 송강호적인 인간형에 보편의 존재를 흡수하고 밖으로 튕겨내는 단단한 탄력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그가 대중이 원하는 영웅상을 거부하지 않는 가운데 일정하게 좌절하거나 닫힌 상황에서 박차고 나오는 에너지를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는 내파된 꿈의 담지자로 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영화에서 맡은 대다수의 역할은 우리 일상에서 실제로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것을 체화하는 인물이며 그 지반 위에서 그는 그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비틀거나 내지르거나 안으로 심하게 삭이는 인물을 통해 독자적인 영웅의 면모를 슬쩍 새기는 것이다.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하는 매우 전형화된 연기자의 모습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그는 심하게 고민하거나 슬퍼하거나 뒤쳐져 있거나 어느 쪽도 아닌 평범한 인물에서 자기 이미지를 새긴 후 거기서 아주 조금씩, 그러나 응축된 힘을 머금고 껍질을 탈각하는, 미세한 동작과 음조와 그 순간의 집중력을 통해 발생시키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응축으로 탈일상적인 순간의 희열을 제공한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숨을 안으로 삼키고 짓는 그 표정은 최선을 다했으나 자기의 무능 외에 시대의 무능까지 짊어진 자의, 그러나 그 이유를 종내는 알지 못하는 자의 무력감과 분노와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극히 일상적인 표정과 몸짓과 음정에서 어느 순간 낯선 이상한 나라에 들어선 것 같은 그 침묵과 정지와 여백의 순간에서 송강호가 짓는 연기의 몸짓 하나하나는, 곧 딱히 안티히어로적인 노선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순응과 거부의 경계선 어딘가에서 낄낄거리며 또는 쓸쓸하게 자조하며 서 있는 이 시대의 단독자의 표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고 웃거나 눈물지으며 우리는 송강호가 우리 옆집에 사는 청년이나 아저씨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에너지로 웃음이나 슬픔을 안겨주는 기상청 날씨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일상적 감정의 짐을 안고 달리는 그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으나 어느 때인가 전혀 다른 비일상적 레일을 타는 표 나지 않는 영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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