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le Review Episode III : My Life is Incomplete - 헤드윅
old/old_scrapbook 2003. 11. 1. 04:29
'헤드윅'은 은근히 '거대한' 영화다. 이 영화는 단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1인치'를 가진 사람의 삶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이라는 '트랜스젠더이자 로커이며 구동독인'인 사람의 인생의 일부이다. 헤드윅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삶을 살게 된 것은 분명히 중요한 사건이지만, 영화는 그것만으로 그를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포함한 그의 삶 전체를 버라이어티 쇼처럼 보여주면서 그의 삶이 무엇을 향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수술에 실패한 트랜스젠더로서 헤드윅이 느끼는 고뇌와 슬픔뿐만 아니라 구동독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록스타와 언더그라운드(혹은 인기없는) 록밴드의 이야기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관점에 따라 영화의 초점이 바뀔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만큼 이야기의 배경과 스타일은 다양해진다. 헤드윅의 인생은 때론 영화로, 혹은 헤드윅의 노래로,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직접적인 묘사와 회고, 그리고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통해 표현되면서 영화는 정신없을정도로 빠르게 그의 인생을 훑어나간다.



불완전한 인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뚜렷한 힘을 가지는 것은 그 모든 형식들을 헤드윅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인생에 대한 어떤 희망과 의지로 묶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다양한 삶은 결국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의 봉합, 혹은 탈피를 꿈꾸는 삶이다. 단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의 성정체성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모든면에서 불완전한 삶의 연속이다. 그는 부모중 아버지가 없고, 분단된 나라에서 살았으며, 미국으로 건너오기위해 미군과 위장결혼을 한 대가로 성전환 수술을 한데다가 그 수술이 실패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분노의 1인치'만 남게 된 인간이 된다. 또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소년은 록스타가 되어 자신을 배신하면서 그는 미국에 건너와서도 또한번 완벽한 록그룹이 아니라 오버그라운드와 분리된 언더그라운드 록그룹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늘 완전한 삶을 원하지만 언제나 불완전한 삶을 살아야하고, 그것은 결국 그의 가사속에서 무의식과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가 상징적인 가사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그의 과거로부터 현재로 올라오는 그의 인생역정,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절절히 쏟아내는 그의 무대위의 모습과 신화로까지 연결되는 애니메이션은 모두 그의 불완전한 현재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꾸는 그의 모습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밴드는 언제나 노래한다



그래서 영화의 실질적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헤드윅의 밴드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공연장면은 단지 헤드윅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정상 필요한 장면일뿐만 아니라 그의 불완전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부분이자, 동시에 산만해질 수도 있었던 영화의 분위기를 하나로 통합해주는 역할을 한다.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는 상징적으로, 그리고 영화적인 에피소드를 통해서는 현실속에 묻혀 은유적으로 제시되었던 그의 불완전성에 대한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으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를 담긴 노래를 통해 표현되면서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다양하게 다루면서도 뚜렷한 주제의식을 다룰 수 있고, 동시에 이 공연장면은 어떤 영상으로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영화의 다양한 면모를 한꺼번에 표현한다. 이 공연장면과 그가 부르는 메시지를 통해 동독과 서독, 성정체성의 문제등은 영화속에서 적은 비중으로 조금씩 다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편적이거나 다른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헤드윅의 불완전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는 공연중 남성의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장스럽게 여성의 외모를 하고 섹시한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 반쪽으로 갈라져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울부짖는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언더그라운드 록그룹으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미국각지의 '빌워터 식당'의 손님이자 관객들은 그들에게 냉담한 시선을 던질뿐이다. 헤드윅은 무대에서마저 관객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국 하나의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무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끊임없이 완전한 존재를 노래하던 그 무대위에서,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 언더그라운드가 가지지 못한 오버그라운드 인기 로커인 토미노시스가 했던 페이스 페인팅을 함으로서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가 되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 불완전한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1인치'의 존재를 또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으로 승화시키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성의 '흉내'를 냈던 치장을 벗겨내고 알몸이 되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피를 벗고 무대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순간, 불완전한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것으로 성공하는 그순간 그는 오히려 완전한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A funny rockumentary



그리고 이는 동시에 절묘하게 '헤드윅'을 한 사람의 정체성찾기일뿐만 아니라 록밴드, 혹은 록음악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종의 풍자영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헤드윅 개인의 기구한 삶을 제외한다면 밴드로서 'Hedwig and the Angry Inch'가 겪는 일들은 한 록매니아가 언더그라운드 록그룹을 결성해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일종의 축소판이다.



헤드윅의 인생에는 록밴드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록의 중심지가 아닌, 오직 라디오로만 들리는 데이빗보위에 대한 꿈을 키우며 변방(동독에 변방이라는 말을 하기가 미안하기는 하지만 미국 록씬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동독도 변방이었을테니)에서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들어와 록을 시작한 청년은 숱한 고생을 겪는다. 그는 자신을 미국으로 들여보낸준 인물에게 배신당하고, 숱한 밴드를 만들며 밑바닥을 전전하지만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또 자신이 모든 것을 가르친 밴드의 멤버는 자신의 자작곡을 훔쳐 달아나 오버그라운드에서 성공하고, 그런사이 그는 온갖 트러블을 겪으면서 관객의 냉소를 받으며, 때론 열성팬도 만들어가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그안에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인기를 가지고 있는 밴드면서도 서로 프런트맨이 되기 위해 은근한 경쟁을 펼치는 밴드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있고(헤드윅이 한국인 여성들과 함께 만든 밴드나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멤버이자 그의 법적인 남편이었던 이치학이나 헤드윅대신 나서려는 모습은 어찌 그리 똑같은지), 밴드 멤버의 위상에따라 표리부동하게 움직이는 매니저가 있다.



이런 일종의 록큐멘터리로서의 모습은 특히 헤드윅이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찾아가는 순간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토미노시스와의 헤프닝으로 인해 로지 오도넬 쇼에 출연할정도로 유명해지면서 그들은 드디어 '완전한 무대'에서 수많은 팬들의 환호성속에 공연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보여주었던 예의 과격하고 파격적인 무대메너를 선보이며 모든 것을 망가뜨릴 때, 환호성을 보내던 밴드의 팬들은 그들을 차갑게 응시하면서 그들은 또다시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가 모든 이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찾기 시작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영상속에서 언더그라운드의 헤드윅이 오버그라운드의 토미노시스를 만난 뒤 그 스스로 토미노시스의 마크를 자신의 얼굴에 칠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상과 함께 지금까지 견지해오던 펑크스타일의 음악이 아닌 가스펠적인 멜로디가 들어있는 록음악을 할 때이다. 언더그라운드가 완벽하게 언더그라운드의 존재로 오버그라운드의 존재가 될수는 없다. 거기에는 약간의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헤드윅'은 한 인간의 매우 다양한 삶의 궤적을 통한 정체성찾기이자, 록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이것들이 합쳐지면서 영화는 헤드윅의 정체성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헤드윅의 성정체성이나 동독이라는 지역적 환경이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의 불완전성이라면, 그의 로커로서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완전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두가지가 합쳐졌을 때, 헤드윅은 비로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 즉 제3의 성정체성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복잡하고 불안정하며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인물이 세상과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나체로 거리를 걷게되는 마지막씬은 그가 이제 완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좁은 골목에서 넓은길로 나가는 영상역시 상징적이다).



슬픈인생에 대한 유쾌한 자세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헤드윅'의 메시지나 결론보다 그 결론을 이끌어내기까지 헤드윅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결국 스스럼없이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어떤 승화를 겪으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는 결론은 어찌보면 진부하고 예상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에 이르기까지 존 캐머런 미첼 감독은 헤드윅과 그의 이야기를 참으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바라본다는 점이다.



영화속에 표현된 그의 인생이나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삶은 사실 매우 처절하고 슬픈 것이다. 그는 늘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미래에 대한 그다지 뚜렷한 비전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헤드윅의 삶을 '불완전하지만 재미있는 삶'으로 그려낸다. 과장된 몸짓과 신나는 음악으로 채워진 밴드의 무대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우울한 현실이면서도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유쾌한 에너지로 가득차있고, 영화속 에피소드들은 결과적으로는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의 연속이면서도 그 인생을 살아가는 헤드윅의 모습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자기파괴적이지 않는다.



헤드윅이라는 인물 자체의 삶은 매우 비극적이고 우울한 것이지만, 그 삶을 사는 헤드윅 자체는 비관과 슬픔이 아닌 긍정과 웃음으로서 그 인생을 돌파해나간다. 헤드윅은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이 이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헤드윅은 그의 성정체성과 언더그라운드 록밴드의 이야기라는 비참하고 슬프지만, 구동독의 결손가정 아이로 태어나 오븐속에 갇혀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어머니의 토마토 세례를 받으며 자라던 아이는 결국 갖은 고생 끝에 자신의 밴드를 만들고, 더욱 나은 밴드를 결성하며, 결국 성공하는 헤드윅 자신의 전체적인 인생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슬픔을 전제로 하면서도 계속 밝고 완전한 삶으로 나아가는 의지의 과정이자 긍정의 에너지가 가진 힘이다. 신나는 음악과 가볍고 감각적인 영상과 함께, 헤드윅은 긍정의 에너지로 이 심각한 스토리에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에 관객이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불완전함의 매력



그래서 이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뮤지컬보다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같은 음악과 코미디가 결합된 버라이어티 TV쇼에 가깝다. 물론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던 작품을 옮겨놓은 것이긴 하지만,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과 밴드의 공연이 교차하고, 어떤 무거운 주제도 밝게 처리하면서 관객에게 자신들의 신나는 무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심지어 함께 노래를 따라부를 것을 요구하기도 하는) 이들의 모습은 관객과 일정 거리를 두며 좀더 점잖은 반응이 어울릴 것 같은 뮤지컬의 무대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왁자하고 솔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TV 버라이어티 쇼의 공개방송무대나 수많은 시청자들을 집에서 뒤집어지게 웃길 수 있는 TV 브라운관이 더욱 어울리는 듯 싶다. 그런점에서는 뮤지컬이 원작이기는 해도 오히려 영화가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해야할까(물론 원작이 되는 뮤지컬을 보지 못했기에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정체성과 록문화에 대한 다른 많은 영화들이 그들의 삶을 관찰하게 하고 사고하게 만들면서 보는 사람에게 그들의 고통을 전달하려 노력한다면, '헤드윅'은 끊임없이 불완전한 정체성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관객이 그것을 동정하거나 그런 그의 여러 문화적/정치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기보다는 일단 신나게 즐기면서 그가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즐길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마치 헤드윅의 밴드 'Hedwig and the Angry Inch'처럼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끝까지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스타일을 동시에 유지하면서 성공하는 그런 모습을 가진, 그래서 관객의 '이해'보다는 '환호'를 이끌어낸다고 해야할까. 어쩌면 문제의 해결이 조금은 가볍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사람의 불완전한 삶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화를 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헤드윅'은 헤드윅처럼 불완전하지만, 역시 헤드윅처럼 그것을 숨기지않고 모든 것을 유쾌하게 드러냄으로서 관객을 즐겁게하는, 불완전함만의 매력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글 : 강명석(LENNON@hitel.net)
: